전업주부에게 32억이 생겼다
어느새 3년

에피소드 2 / 10

회사를 그만두고 첫해는 생각보다 좋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계를 보지 않아도 됐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다 흘려도, 신발을 혼자 신겠다고 떼쓰다 갑자기 다른 장난감을 꺼내도, 예전처럼 속이 타지 않았다.

(서윤) : “그래. 천천히 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집에 돌아와 밀린 집안일을 했다. 그래도 오후가 되면 직접 아이를 데리러 갔다. 이모님에게 사진으로 보던 아이의 오후를 이제는 자기가 봤다. 놀이터에서 한 시간씩 놀기도 하고, 평일 오후에 키즈카페도 갔다.

날이 좋으면 다음 날 갑자기 동물원에 가기도 했다. 회사에 다닐 때는 해보고 싶어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서윤은 꽤 만족했다. ‘그만두길 잘한 것 같기도 한데.’

가끔 그런 생각도 했다. 두 번째 해가 되자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도 어린이집에 잘 다녔고, 낮 동안 서윤에게 몇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처음 퇴사할 때 생각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뭘 해볼까. 서윤은 노트북을 켰다. ‘경력단절 여성 재취업’ 검색했다가 창을 닫았다. 이번에는 ‘집에서 할 수 있는 일’ 또 검색했다.

온라인 쇼핑몰. 블로그. 자격증. 재택근무.

영상 편집. 하루는 한참 찾아보다 온라인 강의 하나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결제금액 280,000원. 손가락이 결제 버튼 앞에서 멈췄다.

‘이걸 배운다고 내가 진짜 할 수 있나?’ 회사에 다닐 때는 업무에 필요하다면 회사 돈으로 교육을 듣기도 했다. 자기계발비로 한 달에 십몇만 원을 쓰는 것도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월급이 없는 사람이 되고 나니 달랐다.

결국 장바구니에서 삭제했다. 조금 더 알아보고 해야지. 서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새 또 1년이 지났다.

퇴사한 지 3년. 아이는 다섯 살이 되었다. 아침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돌아오면 설거지를 했다. 세탁기를 돌렸다.

청소기를 밀었다. 장을 봤다. 냉장고를 정리했다. 저녁 반찬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면 어느새 하원 시간이었다. 남편도 처음부터 집안일을 안 했던 것은 아니다. 맞벌이할 때는 쓰레기도 버리고, 주말에는 청소기도 돌렸다. 그런데 서윤이 집에 있게 된 뒤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남편) : “내가 할게.”

하던 것이

(남편) : “나중에 (너가) 해”

가 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윤 역시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자기는 집에 있었고, 남편은 아침마다 출근했으니까. 그게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아이를 더 나은 환경에서 키워보겠다며 서울 안에서도 조금 더 좋은 동네로 이사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대신 평수를 줄였다. 그리고 대출은 늘었다. 남편 월급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늘 빠듯했다. 대출이자. 관리비. 보험.

식비. 경조사. 한 달이 시작되면 나갈 돈부터 정해져 있었다. 어느 날 하원하는 길이었다.

아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유치원 옆 상가에 있는 미술학원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종이접기와 그림, 알록달록한 찰흙 작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아이는 한참을 들여다봤다.

(아이) : “엄마, 이거 애들이 만든 거야?”

(서윤) : “응. 그런가 봐.”

(아이) : “우와.예쁘다”

아이는 유리창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집에 가자는 말을 해도 한참을 더 봤다. 서윤은 그날 밤 미술학원비를 검색했다. 주 2회.

한 달 18만 원. 보내주고 싶었다. 집에서도 그림 그리는 걸 제일 좋아했다. 말도 또래보다 빨랐다.

유치원 선생님도 종종 말했다.

(선생님) : “어휘가 참 풍부해요.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서윤은 생각했다. 여유만 있으면 영어도 재미있게 한번 시켜보고 싶다고. 미술도. 영어도.

아이가 좋아하는 걸 몇 가지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미술학원 18만 원에 영어까지 붙이면 금세 몇십만 원이었다. 서윤은 계산기를 두드리다 휴대전화를 내려놨다. ‘다섯 살인데 무슨 사교육이야.’

‘지금은 그냥 노는 게 제일 좋지.’ 맞는 말이었다. 서윤도 원래 어린아이에게 학원을 여러 개 돌리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금 찜찜했다.

정말 안 시키고 싶은 건지, 못 시키는 건지는 달랐다. 다음 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또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냉장고를 열어 저녁거리를 확인했다.

된장찌개. 계란말이. 어제 남은 불고기. 오늘도 하루가 대충 보였다.

서윤은 장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섰다. 마트로 가는 길에 작은 로또 판매점이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곳이었다. 가게 앞에는 이번 주 예상 당첨금이 붙어 있었다.

서윤은 잠깐 그것을 바라봤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서윤) : “저거나 되면 좋겠다.”

당연히 될 리 없었다. 그래도 왠지 오늘은 그냥 지나가고 싶지 않았다. 서윤은 가게로 들어갔다.

(서윤) : “자동으로 하나 주세요.”

오천 원을 건넸다. 로또 한 장을 받아 장바구니 안에 대충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마트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윤에게 그 종이는 답답한 날에 산 오천 원짜리 상상이었다.

며칠 뒤, 그 종이의 값이 32억이 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