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4 / 10
서윤은 남편 회사 근처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평일 저녁의 오피스 타운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회사 목걸이를 목에 건 사람들이 건물에서 쏟아져 나왔다.
깔끔한 셔츠와 슬랙스를 입은 여자들. 한 손에 노트북 가방을 들고 빠르게 걷는 사람들.
서윤은 횡단보도 앞 유리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봤다.
청바지. 폴로 반팔티. 오래 신은 운동화.
아까 집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는데, 이곳에 서 있으니 갑자기 뭔가 초라해 보였다.
3년 전에는 자신도 저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동료들과 카페에 갔고, 회의가 있는 날에는 옷도 조금 더 신경 써 입었다.
지금은 남편 회사 사람들을 만나면 뭐라고 소개될까.
‘아내예요.’
그 말이면 충분한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 뒤에 붙을 말이 없는 것 같았다.
서윤은 괜히 티셔츠를 다듬었다.
그때 남편이 보였다.
동료 세 명과 함께 건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서윤은 반가운 마음에 손을 들려다가 멈췄다.
아직 조금 거리가 있었다.
동료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중 한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동료) : “어제 애가 열이 39도까지 올라서 진짜 난리였어요.”
다른 사람이 물었다.
(동료2) : “애는 그럼 누가 봤어?”
(동료) : “장모님한테 전화했죠. 근데 장모님도 병원 예약 있다고 해서 오전만 봐주시고. 이모님한테 오늘만 제발 두 시간만 일찍 와달라고 사정하고. 아, 애 한 번 아프면 온 집이 움직여야 돼요.”
남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 : “형은 그래도 형수님이 집에 있으니까 이런 건 편하잖아요.”
(남편) : “그건 그렇지.”
남편은 잠깐 웃다가 덧붙였다.
(남편) : “대신 혼자 벌어야 하는 부담은 있지.”
서윤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남편을 봤다.
그렇다. 집에 있으니 애를 더 볼 수 있어 좋은건 맞다. 근데 묘하게 그들에게도 나는 '집에 있어 편하게 사는 사람'같았다.
남편은 한 번도 서윤 앞에서 ‘나 혼자 벌어서 힘들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매달 월급이 들어오고, 대출이 빠져나가고, 생활비가 나가고.
서윤이 아이 학원비 18만 원을 어떻게 만들까 고민했던 것처럼 남편도 자기 방식으로 계속 속이 타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도 부담이었겠구나.’
32억이 생긴 오늘에서야 마음속으로 어렴풋하게만 남편도 그럴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눈 앞에 선명히 드러났다.
서윤은 그제야 남편 쪽으로 걸어갔다.
(서윤) : “여보.”
남편이 눈을 크게 떴다.
(남편) : “어? 당신이 여기 웬일이야?”
동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서윤에게 향했다.
서윤은 순간 아까 보았던 여자 직장인들이 떠올랐다.
괜히 자세를 조금 고쳐 섰다.
(서윤) : “근처에 볼일 있어서 왔다가. 같이 저녁 먹으려고.”
남편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웃었다.
(남편) : “진짜? 갑자기?”
동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둘은 자리를 벗어났다.
조금 걷자 남편이 물었다.
(남편) : “근데 오늘 무슨 날이야? 애는?”
(서윤) : “엄마한테 맡겼어.”
(남편) : “식당까지 예약했다고?”
서윤은 잠깐 망설이다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서윤) : “아빠가 용돈 좀 줬어. 내가 오늘 한턱 쏠게.”
(남편) : “장인어른이? 웬 용돈?”
(서윤) : “그냥 주셨어.”
거짓말을 하고 나니 조금 찔렸다. 그래도 오늘은 말할 수 없었다.
아직은.
레스토랑은 평소 둘이 가던 곳보다 훨씬 좋았다. 남편은 메뉴판을 보다가 서윤을 봤다.
(남편) : “여기 너무 비싼데? 너무 비싸서 뭘 먹어도 맛이 없을 것 같아”
(서윤) : “먹어. 비싼 거 시켜.”
(남편) : “장인어른 용돈 많이 주셨나 보네.”
서윤은 웃었다.
32억이라고 하면 남편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당장 대출부터 갚자고 할까. 집을 넓히자고 할까. 차를 바꾸자고 할까. 아니면 회사부터 그만두겠다고 할까.
말하고 싶었다.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남편) : “왜? 할 말 있어?”
(서윤) : “아니.”
서윤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32억.
결혼하고 이렇게 큰돈은커녕 아기가 태어난 후 마음껏 쓸 수 있는 돈을 가져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회사 다닐 때 월급은 들어오자마자 생활비와 아이 차지가 됐다.
퇴사하고 나서는 남편이 번 돈 안에서 생활하며 빠듯했다. 그게 불만이라기보다 그냥 당연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32억이 생겼다.
서윤은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이 돈으로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대출을 갚고, 부모님께 드리고, 아이에게 쓰고.
그 다음에는?
남편에게 먼저 말해버리면 그 순간부터 이 돈은 자연스럽게 또 ‘생활비’가 될 것 같았다.
그게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전에 딱 한 번쯤은, 이 돈을 가진 정서윤 혼자서 생각해보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남편) : “오늘 진짜 왜 그래?”
(서윤) : “뭐가?”
(남편) : “기분 좋아 보여.”
서윤은 웃었다.
(서윤) : “그냥. 오랜만에 나오니까 좋네.”
그날 서윤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남편에게 32억을 숨기기로 한 것도 아니었다. 조금만 더 가지고 있어 보기로 했다.
아무도 모르는, 오롯이 자기만 알고 있는 가능성으로.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 돈으로 나를 위해 어떻게 가치있게 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