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5 / 10
당첨금을 받고 돌아오는 길, 서윤은 마트에 들렀다.
평소처럼 장바구니를 끌고 과일 코너를 지나는데 딸기 앞에서 발이 멈췄다.
아이에게 한 번 사주면 앉은 자리에서 한 팩을 다 먹는 딸기.
그런데 요즘은 한 팩 가격이 만 원을 훌쩍 넘었다.
서윤은 늘 한참 보다가 그냥 지나쳤다.
오늘은 달랐다.
딸기 한 팩을 집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체리도 담았다. 샤인머스캣도 담았다.
평소에는 가격표부터 보던 손이 오늘은 망설이지 않았다.
아이 얼굴이 떠올랐다.
(아이) : “엄마! 딸기 샀어?”
좋아할 생각을 하니 서윤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남편이 좋아하는 비싼 치즈도 하나 담았다. 비싸서 잘 안 사던 소고기도 넣었다.
카트가 평소보다 금세 풍성해졌다. 서윤은 가득 찬 장바구니를 보며 웃었다.
이렇게 사고도 이번 달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이상할 만큼 좋았다.
계산대로 가기 전 서윤은 카트 안을 한번 내려다봤다.
아이 것. 남편 것. 집에서 같이 먹을 것.
문득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도 담았어야 하나... 나는 다 좋아하니까 뭐’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 늘 그랬으니까.
서윤은 그냥 계산대로 향했다.
32억이 생겼다고 해서 그 다음 날부터 삶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아침이면 아이를 유치원에 보냈다.
집으로 돌아와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장을 보고, 저녁을 준비했다.
하원 시간이 되면 아이를 데리러 갔다.
남편은 출근했고, 저녁이면 돌아왔다.
통장 속 숫자만 달라졌을 뿐 서윤의 하루는 그대로였다.
며칠 동안은 오히려 그게 편했다.
당첨금이 있다는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다는 것도 묘하게 재미있었다.
‘나 사실 32억 있어.’
마트 계산대에서도, 유치원 앞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혼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뭘 사고 싶지는 않았다.
명품 가방도, 새 차도, 비싼 시계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서윤은 생각보다 돈을 '잘' 쓰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집에 바로 들어가기 싫었다.
날씨도 좋았다.
‘오늘은 그냥 좀 앉아 있다 들어갈까.’
서윤은 집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평소같으면 커피 값이 아까워 생각도 안했던 곳이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도 없었다. 누굴 만나기로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앉아 있었다.
평일 오전의 카페는 조용했다.
아이를 데리고 있지 않은 것도,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서윤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좋았다.
정말 별것 아닌데 좋았다. ‘이런 게 여유인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창밖을 봤다.
그때 문득 생각났다.
빨래.
아침에 세탁기를 돌려놓고 나왔다. 집에 가서 널어야 했다. 욕실 청소도 해야 하고, 식기세척기 안에 있는 그릇도 꺼내야 했다.
갑자기 머릿속에 할 일이 줄줄이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 편했던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졌다.
서윤은 시계를 봤다.
10시 48분.
‘이제 가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문득 멈췄다.
왜? 왜 꼭 지금 자기가 가야 하지?
서윤은 다시 앉았다. 그리고 휴대전화 검색창을 열었다.
‘가사도우미’
업체가 여러 개 나왔다.
청소. 빨래. 주방 정리.
원하는 시간만큼 예약할 수도 있었다.
가격을 확인했다.
세 시간.
6만 원대.
예전의 서윤이라면 바로 창을 닫았을 것이다.
집에 있는 사람이 청소하는 데 6만 원을 왜 써.
그 돈이면 외식 한 번을 하지.
아니, 아이 미술학원비의 3분의 1인데. 그런 생각부터 했을 것이다.
서윤은 한참 화면을 보았다. 그리고 예약 버튼을 눌렀다.
며칠 뒤.
처음으로 가사도우미가 집에 왔다.
서윤은 괜히 민망했다. 집도 아주 더러운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못 할 일도 없었다.
(도우미) : “어디부터 해드릴까요?”
서윤은 한참 설명했다.
욕실. 주방. 바닥.
빨래도 가능하면 부탁드린다고 했다.
설명을 다 하고도 어색하게 서 있자 도우미가 웃으며 말했다.
(도우미) : “다녀오셔도 돼요. 제가 해놓을게요.”
(서윤) : “아, 네.”
서윤은 가방을 들고 집에서 나왔다. 아무 데도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또 카페에 갔다.
지난번과 같은 자리에는 사람이 있어 그 옆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시켰다.
이번에는 빨래 생각이 나도 일어나지 않아도 됐다.
욕실 생각이 나도 집에 갈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 대신 하고 있었다. 서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한 시간.
두 시간.
오랜만에 시간 자체가 자기 것이 된 느낌이었다.
세 시간 뒤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바닥이 반짝였다.
욕실은 물기 없이 정리돼 있었고, 널어둔 빨래는 개어져 있었다.
싱크대도 깨끗했다.
서윤은 집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동안 자기가 하던 일이었다.
오늘은 누군가 그 일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커피를 마셨다. 창밖을 봤다. 조금 걸었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루가 덜 답답했다.
서윤은 휴대전화에 찍힌 결제 내역을 봤다.
64,000원.
예전 같았으면 아깝다고 생각했을 돈.
오늘은 아니었다.
서윤은 처음으로 알았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물건만이 아니었다.
청소를 산 것도 아니었다. 빨래를 산 것도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샀다.
서윤은 소파에 앉아 아무도 없는 거실을 바라봤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서윤) :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네.”
그 말이 32억이 생긴 뒤 처음으로 진짜 돈이 많아졌다는 걸 실감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