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 10
서윤은 일을 꽤 잘했다. 대단한 대기업도 아니었고, 연봉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회의에서 서윤이 입을 열면 사람들이 들었고, 후배들은 모르는 게 생기면 서윤 자리로 왔다. 입사 7년 차쯤 되었을 때는 팀장이 말했다.
(팀장) : “서윤 씨 없으면 이 프로젝트 굴러가겠어?”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았다. 회사에 목숨을 걸 만큼 일이 좋았던 건 아니다. 월요일 아침은 싫었고, 금요일 오후는 좋았다. 그래도 적어도 회사에서는 내가 뭘 잘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 서윤이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그리고 1년 뒤, 드디어 복직했다. 복직을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이를 봐줄 이모님을 구하는 것이었다. 친정엄마는 몇 년 전 무릎 수술을 했다.
(엄마) : “내가 봐주면 좋은데.. 무릎이 이래서 어쩌니.”
시부모님은 경기권에 살았다. 출퇴근 시간까지 생각하면 매일 오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몇 명을 만나본 끝에 마음에 드는 이모님을 구했다. 그제야 서윤은 회사로 돌아갔다.
그런데 복직한 뒤의 하루는 예전과 전혀 달랐다. 아침 6시 반. 아이 아침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어린이집 가방을 챙겼다. 냉장고에는 이모님이 먹일 간식과 반찬을 확인하고 냉장고에 간단한 메모를 붙여뒀다.
아이와 허겁지겁 어린이집으로 간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들여놓고 나면 그제야 휴대전화를 봤다. 8시 21분. 버스를 놓치면 늦는다.
회사에 도착하면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메신저가 쌓여 있었다. 오후 회의 중 이모님에게 전화가 오면 심장이 철렁했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반대로 아이가 열이 나 조퇴라도 하면 회사 사람들이 신경 쓰였다.
결국 늘 둘 중 하나에게 미안했다. 회사에 있으면 아이에게. 아이 곁에 있으면 회사에. 그래도 서윤은 버텼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복직한 지 일 년쯤 되었을 때였다. 퇴근 후 집에 들어가는데 이모님이 평소와 달리 할 말이 있다고 했다. 표정부터 이상했다.
(서윤) : “무슨 일 있으세요?”
이모님이 한참 망설이다 말했다.
(이모님) : “저… 다음 달까지만 해야 할 것 같아요.”
서윤은 그대로 굳었다. 시골에 계신 시아버지가 위독하다고 했다. 남편도 내려가야 하고, 자기도 병간호를 해야 한다고.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서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건 붙잡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니었다.
(서윤) : “아니에요. 어떡해요. 가셔야죠.”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계산이 시작됐다. 다시 사람을 구해야 한다. 면접을 보고. 아이에게 적응시키고.
또 그 사람이 언제까지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아이가 잠든 뒤 서윤과 남편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남편) : “다시 알아봐야겠네.”
(서윤) : “응.”
서윤은 대답하면서도 휴대전화로 베이비시터 시급을 검색하고 있었다. 지난번보다 더 올랐다. 월급에서 이모님 비용을 빼고 나면 생각보다 남는 돈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돈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서윤은 회사 선배들을 떠올렸다. 팀장급 이상은 대부분 남자였다. 40대 중반까지 남아 있는 여자 선배는 손에 꼽았다. 어렵게 버텨도 그 나이가 되면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거나 중학생쯤일 것이다.
서윤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엄마 손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지금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다른 사람 손에 맡기고, 정작 아이가 혼자 학원도 다니고 친구들과 노는 나이가 되면 자기가 집에 있게 될 수도 있었다. 남편이 물었다.
(남편) : “어떻게 하고 싶어?”
서윤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말했다.
(서윤) : “그냥 내가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남편도 바로 반대하지 않았다. 둘은 꽤 오래 이야기를 했다. 돈. 아이.
회사. 앞으로 몇 년. 아무리 계산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제일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였다. 사직서를 내고 나서 서윤은 이상하게 조금 신이 났다.
아쉬울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이제 아침마다 뛰지 않아도 된다. 아이 아프다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회의실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아도 된다. 평일에 아이와 멀리 놀러 갈 수도 있다.
아이 조금 크면 여행도 다녀야지. 그리고 그동안 궁금했던 것도 배워보고 싶었다. 꼭 다시 회사에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온라인으로 뭔가 해볼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조금 쉬고 생각해보자.’ 마지막 출근 날. 서윤은 노트북을 반납하고 서랍을 비웠다. 회사 출입증을 목에서 빼 인사팀 직원에게 건넸다.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 건물 밖으로 나오자 어깨가 가벼웠다. 서윤은 카페에 들러 평소보다 비싼 커피를 하나 샀다. 그리고 혼자 웃었다.
이제 뭘 해볼까. 그때의 서윤은 정말 몰랐다. 그 질문을 품은 채,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3년이 지나가게 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