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에게 32억이 생겼다
32억

에피소드 3 / 10

주말은 평소처럼 정신없이 지나갔다. 토요일 아침부터 아이가 배고프다고 했고, 밥을 먹이고 나니 남편이 점심은 뭐냐고 물었다. 점심을 먹고 치우니 아이가 밖에 나가자고 했다. 일요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윤은 금요일에 산 로또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벗어둔 신발을 정리하고, 식탁 위 아침 먹은 흔적을 치우고, 청소기를 돌렸다. 빨래를 개다가 식탁 한쪽에 접힌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로또였다. 서윤은 빨래 한 장을 들고 잠깐 멈췄다.

(서윤) : “아, 이거.”

휴대전화를 꺼냈다. 당첨번호를 검색했다. 첫 번째 숫자. 맞았다.

두 번째. 맞았다. 세 번째도. 서윤은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내려놓았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전부 같았다.

서윤은 화면과 종이를 번갈아 봤다. 다시 처음부터 확인했다.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 번.

1등. 예상 당첨금은 세후 약 32억. 서윤은 식탁 의자에 그대로 앉았다. 손끝이 조금씩 떨렸다.

(서윤) : “미쳤나 봐…”

혼자 말하고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실감이 안 났다.

가장 먼저 남편이 떠올랐다. 카톡창을 열었다.

[서윤 : 여보]

거기까지 쓰고 멈췄다. 이걸 카톡으로 말한다고? 서윤은 입력한 글자를 지웠다. 직접 말해주고 싶었다.

좋은 데서 밥도 먹고, 남편 얼굴을 보면서 말하고 싶었다.

서윤은 친정엄마에게 전화했다.

(서윤) : “엄마, 오늘 저녁에 잠깐 애 좀 봐줄 수 있어?”

(엄마) : “갑자기? 어디 가게?”

(서윤) : “응. 그냥 저녁에 일이 좀 있어서.”

엄마는 된다고 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언니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 “너희 언니는 오늘도 늦는다더라. 애 키우면서 맞벌이하려니 아등바등 한다 아주.”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곤 냉장고 문을 열어 저녁 반찬을 확인하며 말했다.

(서윤) : “내가 아까 불고기 재워놓은걸로 구워둘게. 계란말이도 해놓고. 저녁 그냥 데워서만 먹으면 돼!”

아이 이야기도 했다.

(서윤) : “요즘 말을 너무 잘해. 유치원 선생님도 어휘가 빠르대.”

(엄마) : “엄마가 직접 키우니까 그렇지. 애가 똑부러지잖아. 근데 언니는 퇴근하고 오면 애한테 관심 쓸 시간도 없어서, 애가 서이랑 동갑인데 한 1년은 느린 것 같아. 유치원 준비물도 빼먹는대~”

분명 우리 애 칭찬이었다. 나쁜 뜻도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묘하게 걸렸다. 언니네는 부부 소득이 서윤네보다 훨씬 높았다.

집도 더 비싼 곳으로 옮겼고, 그만큼 큰 대출도 감수했다. 언니는 그 선택을 해서 맞벌이를 그만둘 수 없었고, 서윤은 다른 선택을 했다. 그런데 가족들 눈에는 언니는 늘 ‘맞벌이하느라 고생하는 딸’이었고, 서윤은 ‘집에서 편하게 아이 잘 키우는 딸’처럼 느껴졌다.

서윤은 잠깐 말이 없어졌다. 내 마음은 답답할 때가 많은데… 남들이 보기엔 팔자가 편한 사람이구나. 조금 서글펐다.

그런데 오늘은 오래 가라앉지 않았다. 식탁 위 로또가 눈에 들어왔다. 서윤은 혼자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아. 나 32억 있잖아.’

전화를 끊고 바로 레스토랑을 검색했다. 평소라면 가격부터 봤을 곳이었다. 오늘은 후기와 분위기만 보고 예약했다. 오랜만에 남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화장대도 없는 서윤은, 욕실 슬라이딩장을 열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화장품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었다. 립밤처럼 쓰던 립스틱 하나.

다이소에서 산 5천 원짜리 팩트 하나.

(서윤) : “이게 다네.”

예전에 쓰던 아이섀도와 블러셔는 이사 오며 집을 줄일 때 대부분 버렸다. 이젠 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옷장을 열었다. 이번에는 더 막막했다. 유치원 등하원할 때 입는 옷. 마트 갈 때 입는 옷.

집 앞 카페 갈 때 입는 옷. 온통 츄리닝 뿐이었다. 레스토랑에 입고 갈 옷은 없었다. 한참 뒤 서윤이 꺼낸 건 청바지였다.

거기에 퇴사하기 전에 샀던 폴로 반팔티. 츄리닝이 아닌 것 중에서는 그게 제일 나았다. 거울 앞에 섰다. 이상하게 슬프지는 않았다.

그동안 아이와 지낸 시간도 좋았고, 자기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도 거의 없었다. 다만 외출복이 없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을 뿐이다. ‘나 옷 마지막으로 산 게 언제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윤은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 속 자신을 한 번 더 봤다. 괜찮았다. 오늘은 정말 괜찮았다. 옷이 없어도, 화장품이 없어도.

서윤에게는 지금 32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