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3 / 10
월요일 아침. 숫자는 여전히 보였다. 민서는 출근하자마자 회사 사람들을 살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경영지원팀 김 과장. 0 옆 부서 박 대리.
17 처음 보는 신입사원. 6
회의실에서 마주친 개발팀 차장. 31 대부분 50을 넘지 않았다.
가장 높은 숫자가 뭔지는 아직 보지 못했다. 민서는 자리에 앉아 메모장을 열었다. 남자에게만 보임.
0~? 사람마다 다름. 조금 고민하다 한 줄을 추가했다.
기준 모르겠음. 숫자가 성격 점수인가 싶다가도, 평소 성격 좋기로 유명한 김 과장이 0인 걸 보면 아닌 것 같았다.
능력치? 건강? 남은 수명?
그렇다고 보기엔 신입사원이 6인 게 너무 불길했다. 민서는 메모장을 닫았다. 알아서 뭐 하겠어.
일이나 하자. 그런데 신경을 안 쓰려고 할수록 더 눈에 들어왔다. 점심을 먹으러 나가면 남자들 머리 위로 숫자가 떠다녔다.
3 21 8
34 사람 얼굴보다 숫자를 먼저 보게 됐다.
(세린) : “대리님.”
민서가 흠칫했다.
(민서) : “응?”
(세린) : “뭐 보세요?”
(민서) : “아무것도.”
세린이 민서가 바라보던 남자들 머리 위 허공을 따라봤다. 그 아래에는 남자 직원 둘이 서 있었다. 세린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세린) : “아무것도 아닌 눈빛은 아니었는데.”
(민서) :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세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믿는 얼굴은 아니었다. 민서는 다시 모니터를 봤다.
저 숫자가 뭔지 몰라도, 남들이 볼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건 확실했다.
그날 저녁. 퇴근길에 현주에게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었다.
“어, 현주야.”
— 너 퇴근했어?
“응. 집 가는 중.”
— 통화돼?
현주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민서는 걸음을 조금 늦췄다. “왜. 무슨 일 있어?”
잠깐 침묵이 흘렀다.
— 오늘 또 은행에서 연락 왔어.
민서는 바로 알아들었다. 현주의 전남편 이야기였다. 결혼 전부터 빚이 있었고,
그걸 숨겼던 남자. 이혼은 했지만 정리되지 않은 문제들이 가끔 현주를 다시 붙잡았다.
— 진짜 지긋지긋하다.
민서는 아무 말 없이 들었다.
— 나 결혼할 때 걔 빚 있는지 알았으면 안 했어. 진짜야.
현주는 한숨을 쉬었다.
— 그때는 돈 얘기하면 너무 계산적인 사람 같았거든.
— 사랑하는데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물어봐야 하나 싶었고.
— 근데 해야 돼.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 민서야. 너 나중에 남자 만나면 진짜 다 물어봐.
— 얼마 버는지, 빚 있는지, 부모님 노후 준비됐는지.
민서가 작게 웃었다. “야, 첫 만남부터 신용조회 하냐?”
— 웃지 마. 나 진짜 하는 말이야.
현주는 웃지 않았다.
— 돈 때문에 사랑이 깨지는거야.
— 돈 때문에 사람도 달라져.
— 처음엔 둘이 어떻게든 해보자고 하지.
— 그러다가 왜 네 빚을 내가 갚아야 하냐가 되고,
— 왜 우리 부모님 돈까지 들어가야 하냐가 되고,
— 나중에는 얼굴만 봐도 그 빚 생각나.
민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현주의 말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 너는 나처럼 하지 마.
— 좋아하는 것도 중요하지.
— 근데 결혼할 사람이면 조건도 봐야 돼.
— 사랑만 가지고 사는 거 아니더라.
통화를 끝낸 뒤에도 민서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사랑만 가지고 사는 거 아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현주가 많이 데였으니까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주변을 보면 꼭 틀린 말 같지도 않았다. 일찍 결혼한 친구는 남편과 같이 돈을 모아 양가의 도움까지 얻어 서울에 집을 샀다. 현주는 돈 때문에 이혼했다.
결혼이라는 걸 하려면, 좋아하는 것 말고도 봐야 할 게 꽤 많은 모양이었다. 민서는 문득 생각했다.
돈도 중요하긴 한가 보다. 많으면 좋고. 적어도 문제는 없는 사람.
그 정도는 봐야 하나. 곧 생각을 접었다. 그 전에 만날 남자부터 있어야지.
이틀 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응.”
— 너 토요일 뭐 해?
엄마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떠 있었다. 민서는 바로 경계했다. “왜.”
— 엄마가 사람 하나 알아봤어.
“또?”
— 이번엔 진짜 괜찮아.
엄마는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했다. “몇 살인데?”
— 서른일곱.
일단 마흔은 아니었다. “직업은?”
— S* 대기업 다닌대.
민서가 잠깐 조용해졌다. 엄마 목소리가 한층 신났다.
— 대치동에서 컸대. 부모님도 아직 그쪽 사시고.
— 아들도 잠실에 집이 있대.
“집이 있어?”
— 응. 대출이 좀 있긴 한데 요즘 서울에 집 있으면서 대출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민서는 소파에 앉았다. 엄마가 뿌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 사진도 봤는데 인물도 멀쩡해.
“엄마가 어떻게 사진까지 봤어.”
— 엄마 교회 친한 분이 소개시켜 주시는거니까.
“무서운데.”
— 너 이번엔 나가.
“……”
— 송민서.
엄마가 이름 석 자를 불렀다.
— 이런 사람이 맨날 들어오는 줄 알아?
민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S* 대기업. 잠실 자가.
부모님 대치동. 서른일곱. 며칠 전 현주의 말이 생각났다.
조건도 봐야 돼. “사진 보내봐.” 전화기 너머로 엄마가 잠깐 조용해졌다.
곧 목소리가 커졌다.
— 나갈 거야?
“사진부터.”
— 알았어. 엄마가 바로 보낼게.
전화를 끊자 10초도 안 돼 사진이 왔다. 정장 차림의 남자였다. 잘생겼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인상은 깔끔했다. 민서는 사진을 확대해봤다. 특별히 마음에 들지도,
싫지도 않았다.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가볼게.
읽음 표시가 뜨자마자 전화가 왔다. 민서는 받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
민서는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평소보다 신경 써서 입기는 했다. 그렇다고 소개팅 하나 때문에 새 옷까지 산 건 아니었다.
몇 번 입지 않은 원피스를 꺼냈고, 평소보다 화장을 조금 꼼꼼히 했다. 거울을 한번 봤다.
이 정도면 됐지. 카페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약속 시간 2분 전.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왔다. 사진에서 본 얼굴이었다. 남자가 민서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 순간, 민서는 남자의 머리 위를 봤다. 51
처음으로 50이 넘는 숫자였다. 민서는 자신도 모르게 숫자를 한번 더 확인했다. 51
남자가 웃었다.
(준호) : “송민서 씨 맞으시죠?”
(민서) : “네. 박준호 씨?”
(준호) : “네. 반갑습니다.”
준호는 의자를 빼고 앉았다. 목소리도 차분했고, 옷차림도 단정했다.
엄마 말대로 멀쩡했다. 처음에는 평범한 이야기부터 했다. 회사.
출퇴근. 주말. 취미.
준호는 말을 잘했다. 자기 이야기만 하지도 않았고, 민서가 말할 때는 적당히 질문도 했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커피가 반쯤 줄었을 때 준호가 물었다.
(준호) : “웹기획 쪽이면 계속 커리어 이어가실 생각이세요?”
(민서) : “네. 특별한 일 없으면요.”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 : “저도 맞벌이가 좋다고 생각해요.”
민서는 별생각 없이 웃었다.
(민서) : “요즘은 한 명 벌어서 살기 어렵죠.”
그 순간 숫자가 바뀌었다. 58 민서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
착각인가. 준호는 계속 말했다.
(준호) : “저도 집은 마련했는데 대출이 좀 있어요.”
(민서) : “요즘 집 사면서 대출 없는 사람이 더 드물죠.”
63 또 올랐다. 민서는 커피잔을 들었다.
이상했다.
(준호) : “저는 부부가 되면 어차피 한 팀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민서) : “한 팀이요?”
(준호) : “네. 각자 돈 따로 관리하는 것보다 같이 계획 세우고 빨리 자산 만드는 게 낫지 않나 해서.”
민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자체는 맞는 것 같았다. 준호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준호) : “양가도 여력이 되면 처음에 조금씩 도와주시면 좋고요. 괜히 이자 오래 내는 것보다 그게 결국 부부한테 남는 거니까.”
아. 이쪽이었구나. 민서는 준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자기 집에 있는 대출. 결혼하게 되면 처가에서도 어느 정도 도와줄 수 있는지. 대놓고 묻지는 않았다.
민서는 준호를 한번 바라봤다. 여우네. 그렇다고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현주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결혼할 사람이면 조건도 봐야 돼. 민서네 부모님은 크게 부족한 편은 아니었다.
딸 하나 결혼할 때 어느 정도 도와줄 여력도 있었다. 민서는 솔직하게 말했다.
(민서) : “저희 부모님도 결혼하면 어느 정도는 도와주실 생각이 있으세요.”
숫자가 움직였다. 71 민서는 이번에는 확실히 봤다.
올라갔다. 준호 표정도 조금 더 편해진 것 같았다.
(준호) : “부모님도 서울에 계세요?”
(민서) : “네.”
(준호) : “가깝게 사세요?”
(민서) : “차로 삼십 분 정도요.”
(준호) : “좋네요.”
준호가 웃었다.
(준호) : “저는 나중에 아이 낳으면 양가 도움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요.”
민서가 조금 웃었다.
(민서) : “벌써 아이까지 갔네요?”
(준호) : “제가 좀 현실적인 편이에요.”
그 말은 맞는 것 같았다. 준호는 잠시 후 또 자연스럽게 교육 이야기를 꺼냈다.
(준호) : “저는 대치동에서 학교 다녔거든요.”
(민서) : “어머니께 들었어요.”
(준호) : “벌써 거기까지요?”
둘 다 웃었다.
(준호) : “그래서 그런가.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교육환경은 좀 신경 쓰고 싶어요.”
(민서) : “저도 교육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78 준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준호) : “엄마가 일한다고 아이 교육을 놓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요.”
민서는 그 말을 잠깐 생각했다. 엄마도 일하고. 육아도 하고.
교육도 챙기고. 듣다 보면 결국 여자가 할 일이 꽤 많은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준호는 곧 덧붙였다.
(준호) : “물론 남편도 같이 해야죠.”
말은 완벽했다. 민서도 웃었다.
(민서) : “그럼 좋죠.”
83 또 올랐다. 민서는 이제 준호가 하는 말보다 숫자가 더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51이었다. 자신과 생각이 맞는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숫자가 올라갔다. 그리고 소개팅이 끝날 무렵,
준호가 먼저 말했다.
(준호) : “저 오늘 생각보다 되게 좋았어요.”
숫자는 87 이었다.
민서는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 : “민서 씨만 괜찮으시면 다음 주에 또 뵙고 싶어요.”
90 순간, 며칠 동안 봤던 숫자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회사 사람들. 길거리 남자들. 편의점 직원.
대부분 50도 넘지 않았던 숫자. 그리고 지금. 자신을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남자.
90 민서는 처음으로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이 숫자. 나에 대한 호감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