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몇 퍼센트?
실험

에피소드 4 / 10

월요일 아침. 민서는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남자들의 머리 위부터 봤다. 4

0 12 예전 같으면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았을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숫자가 먼저 보였다.

준호 하나만 가지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우연일 수도 있었다. 민서는 오전 내내 고민했다.

어떻게 확인하지.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저 좋아하세요?”

회사에서 이러고 다닐 수는 없었다. 결국 가장 만만한 사람을 골랐다. 같은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개발팀 이 대리.

평소 숫자는 8 이었다.

점심시간 직전. 이 대리가 자리 옆을 지나갔다. 민서는 평소보다 조금 밝게 웃었다.

(민서) : “이 대리님.”

(이 대리) : “네?”

(민서) : “지난번에 수정해주신 거 봤어요. 제가 애매하게 전달했는데 잘 잡아주셨더라고요.”

이 대리가 잠깐 멈췄다.

(이 대리) : “아, 별거 아닌데요.”

(민서) : “아니에요. 덕분에 빨리 끝났어요. 감사해요.”

이 대리가 웃었다. 8 잠시 뒤.

13 민서는 표정을 관리했다. 올랐다.

진짜 올라갔다.

두 번째 실험. 이번에는 옷이었다. 평소에는 검은 바지에 셔츠나 니트를 입었다.

편하고, 무난하고,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다음 날 민서는 옷장 깊숙이 들어가 있던 연한 색 원피스를 꺼냈다. 거울 앞에 섰다. 너무 꾸민 것 같나.

다시 벗으려다가 멈췄다. 실험인데 뭐. 회사에 도착했다.

세린이 민서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세린) : “대리님.”

(민서) : “왜.”

(세린) : “오늘 뭐 있으세요?”

(민서) : “뭐가.”

(세린) : “예쁜데요?”

민서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민서) : “평소엔 안 예뻤어?”

(세린) : “그 말이 아니라요.”

(민서) : “됐어.”

세린이 웃었다. 민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모니터를 켰다. 그러면서 주변 숫자를 확인했다.

옆 부서 박 대리. 원래 17. 오늘은

22 회의실에서 자주 마주치는 정 과장. 원래 11.

16 민서는 모니터를 보면서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효과가 있었다.

엄청나지는 않았다. 옷 한 번 예쁘게 입었다고 80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것도 나름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다.

세 번째 실험은 조금 더 노골적이었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다가 숫자 21인 남자 직원과 마주쳤다. 민서는 평소라면 먼저 나갔을 텐데,

그날은 일부러 말을 걸었다.

(민서) : “오늘 커피 벌써 세 잔째 아니에요?”

남자가 자기 컵을 내려다봤다.

(남자 직원) : “어떻게 아셨어요?”

(민서) : “아침에도 여기서 봤으니까요.”

(남자 직원) : “저를 그렇게 보고 계셨습니까?”

민서가 순간 굳었다.

(민서) : “커피를요.”

남자가 웃었다. 21 29

민서는 커피를 들고 돌아섰다. 확실했다. 자리로 돌아오자 세린이 민서를 쳐다봤다.

(세린) : “대리님.”

(민서) : “응.”

(세린) : “요즘 좀 이상해요.”

민서의 손이 멈췄다.

(민서) : “내가?”

(세린) : “네.”

잠깐 긴장했다.

(세린) : “사람한테 관심이 생겼어요.”

(민서) : “내가 원래 사람한테 관심이 없었어?”

(세린) : “엄청요.”

맞다. 회사에서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던 지난 날이 떠올랐다.

퇴근길. 민서는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숫자를 봤다. 3

0 14 26

이상하게 재미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출퇴근길에 사람 얼굴을 볼 일이 없었다. 이어폰을 끼고,

휴대전화만 보고, 회사와 집을 오갔다. 앞을 보지 않아도 자동으로 걸어가 지는 기분. 늘 똑 같은 길.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저 사람은 왜 26이지. 저 사람은 왜 0이지.

내가 웃어주면 올라가나. 말을 걸면? 친해지면?

민서는 지하철에 올라타 자리에 앉았다.

마침 준호에게 메시지가 왔다.

[준호 : 오늘 퇴근 잘하셨어요?]

민서는 화면을 바라봤다. 준호의 마지막 숫자. 90

이제 거의 확실했다. 그렇다면. 민서는 문득 생각했다.

이거 생각보다 엄청 편한 거 아닌가. 누가 나한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먼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괜히 혼자 의미 부여할 필요도 없고, 가능성 없는 사람한테 시간 쓸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중에서

직업. 성격. 경제적인 조건.

생활 방식. 나랑 맞는 사람을 고르면 된다. 민서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연애에서 제일 알기 어려운 조건 하나를 나는 이미 볼 수 있었다.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민서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이상한 숫자가 보이기 시작한 뒤로, 처음이었다.

회사 가는 게, 살아가는 게 조금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