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5 / 10
준호와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아침에는 먼저 출근했냐는 메시지가 왔고, 점심시간이면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
퇴근할 때쯤이면 하루가 어땠냐고 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적당했다.
답장이 조금 늦어도 재촉하지 않았고, 밤늦게까지 연락을 붙잡고 있지도 않았다. 민서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준호의 숫자는 계속 높았다. 두 번째로 만났을 때.
92 세 번째로 만났을 때. 96
민서가 웃을 때면 숫자가 가끔 움직였다. 다시 96. 민서는 이제 그 변화를 보는 게 익숙해졌다.
준호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편했다.
네 번째 약속이 있던 토요일. 민서는 옷장 앞에 섰다. 약속까지 두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셔츠를 하나 꺼냈다가 넣었다. 니트를 꺼냈다. 바지랑 대충 맞춰봤다.
괜찮았다. 그대로 침대 위에 올려놨다. 문득 웃음이 났다.
스물넷쯤에는 이렇지 않았다. 남자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이면 전날부터 옷을 골랐다. 원피스를 입었다가,
거울을 보고 벗고, 다른 옷을 입었다가, 친구에게 사진까지 보냈다.
이게 나아? 아니면 아까 거? 약속 시간보다 한참 전부터 화장을 했고,
머리가 마음에 안 들면 다시 감은 적도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는 괜히 향수도 한 번 더 뿌렸다. 남자친구를 만나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다.
민서는 침대 위의 니트와 바지를 바라봤다. 지금은 그냥 깔끔하면 됐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른다섯이잖아. 데이트도 몇 번 해봤고,
남자도 만나봤고. 스무 살처럼 옷 하나 가지고 하루 종일 고민할 나이는 아니지. 오히려 지금이 편했다.
민서는 씻으러 들어갔다.
준호는 약속 장소에 먼저 와 있었다.
(준호) : “왔어요?”
(민서) : “많이 기다렸어요?”
(준호) :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거짓말 같았다. 테이블 위의 물이 이미 반쯤 줄어 있었다. 민서는 준호의 머리 위를 봤다.
97 오늘도 높았다. 두 사람은 밥을 먹고,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준호는 다음 달에 회사 일이 바빠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민서는 최근 프로젝트 얘기를 했다.
말은 잘 통했다. 불편하지 않았다. 준호는 계산할 때도 자연스러웠고,
직원에게도 예의가 있었다. 민서가 이야기할 때 휴대전화를 보지도 않았다. 좋은 사람이네.
민서는 생각했다.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는
싫을 만한 구석이 없었다. 조건도 좋았다. 직장도 안정적이었다.
서울에 자기 집도 있었다. 가족 환경도 비슷했다. 돈에 대한 생각도 어느 정도 맞았다.
결혼과 아이에 대한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좋아한다. 민서는 준호 머리 위를 다시 봤다.
98 이 정도면 뭐가 더 필요하지? 저녁을 먹고 둘은 조금 걸었다.
날씨가 좋았다. 준호가 평소보다 가까이 걸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준호가 말했다.
(준호) : “민서 씨.”
(민서) : “네?”
(준호) : “저 사실 소개팅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민서가 웃었다.
(민서) : “저도요.”
(준호) : “근데 이번엔 잘 나온 것 같아요.”
숫자가 움직였다. 99 민서는 숫자를 바라봤다.
준호가 말을 이었다.
(준호) : “저는 이제 사람 오래 알아가면서 몇 달씩 애매하게 만나는 건 별로라서요.”
준호다운 말이었다.
(준호) : “좋으면 만나보고, 아니면 아닌 거고.”
(민서) : “효율적이네요.”
(준호) : “그렇죠?”
준호가 웃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뒤, 준호가 멈췄다.
(준호) : “저는 민서 씨 좋아요.”
민서도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숫자가 바뀌었다. 100
민서는 잠깐 그 숫자를 바라봤다. 처음 보는 숫자였다. 더 올라갈 곳도 없는 숫자.
준호가 자신을 완전히 마음에 들어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보다 확실할 수 있을까.
(준호) : “우리 이제 소개팅 말고 그냥 만날래요?”
민서는 잠깐 생각했다. 싫은가? 아니었다.
부담스러운가? 그것도 아니었다. 조건도 좋았고,
대화도 잘 통했고, 자신을 좋아했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민서는 웃었다.
(민서) : “그래요.”
준호도 웃었다. 그렇게 둘은 연애를 시작했다.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다만 연락할 사람이 생겼다. 금요일 밤에 다음 날 뭐 할지 정해졌고, 주말이면 자연스럽게 약속이 생겼다.
회사에서 퇴근할 때도 오늘 저녁에는 준호를 만난다는 생각을 했다. 무료했던 일상에 일정이 생겼다.
괜찮았다. 민서는 준호를 만나러 갈 때면 옷장에서 적당히 괜찮은 옷을 골랐다. 새 옷을 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지는 않았다.
립스틱을 한번 고쳐 바르고, 머리가 심하게 이상하지 않은지만 확인했다. 20대 때처럼 약속 몇 시간 전부터 거울 앞을 서성이지 않았다.
데이트 전날 잠이 안 오는 일도 없었다. 휴대전화에 준호 이름이 떠도, 심장이 먼저 뛰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민서는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원래 이런 건가 보다. 스무 살 때처럼 사람 하나 만난다고 세상이 뒤집히는 나이도 아니고.
좋아하는 마음도 조금 차분해지는 거겠지. 오히려 이런 연애가 더 어른스러운 걸지도 몰랐다.
준호는 잘해줬다. 약속도 잘 지켰고, 민서의 일정도 배려했다.
민서가 야근하는 날이면 늦게 만나자고 조르지도 않았다. 주말에는 좋은 식당을 찾아뒀고, 다음 데이트도 먼저 계획했다.
누가 봐도 괜찮은 남자였다. 어느 날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민서는 화장을 지우다 거울을 봤다.
오늘도 즐거웠다. 분명 즐거웠다. 준호도 좋았다.
아마.
민서는 스킨을 얼굴에 두드렸다. 예전 연애가 너무 오래전이라 어떤 느낌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연애라는 게 원래 점점 이런 식이 되는 건지도 몰랐다. 안정적이고, 편하고,
예측 가능하고. 나를 좋아하는 게 확실한 사람과 조건까지 잘 맞는 것.
민서는 생각했다. 이 정도면 잘하고 있는 거겠지. 휴대전화가 울렸다.
[준호 : 오늘도 즐거웠어요. 잘 자요 :)]
민서는 답장을 보냈다.
[민서 : 저도요. 잘 자요.]
그리고 휴대전화를 내려놨다. 몇 초 뒤, 아무렇지 않게 드라이기를 들었다.
그때의 민서는 아직 몰랐다. 설레지 않는 것과 익숙해진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