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몇 퍼센트?
별일 없는 서른다섯

에피소드 1 / 10

민서는 서른다섯이었다. 정확히는, 서른다섯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생일이라고 특별한 건 없었다.

회사 사람 몇 명이 메신저로 케이크 이모티콘을 보내줬고, 엄마는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 미역국은 먹었냐고 물었다. 저녁에는 혼자 파스타를 시켜 먹었다. 예전에는 생일이면 약속을 잡았다.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고, 사진을 찍고, 다음 날 숙취로 고생했다. 요즘은 생일이 평일이면 그냥 평일이었다. 민서는 입사 9년 차였다.

대리라는 직급을 꽤 오래 달았고, 이제 슬슬 과장 승진 얘기가 나오는 시기였다. 일을 못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했다.

보고서는 빠르게 만들었고, 회의에서는 어떤 말을 해야 안전한지 알았고, 문제가 생기면 누구에게 먼저 연락해야 하는지도 알았다. 신입 때는 일을 잘하면 인정받는 줄 알았다. 30대 초반까지는 꽤 열심히 자기계발도 했다.

퇴근 후에 강의를 듣고, 자격증을 알아보고, 업무 관련 책도 샀다. 그런데 9년쯤 회사에 다니고 나니 알게 됐다. 일을 잘한다고 꼭 승진하는 것도 아니었다.

승진은 타이밍이 있었고, 자리가 있어야 했고, 누구 밑에서 일했는지도 중요했다. 그리고 과장이 된다고 월급이 드라마틱하게 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했다.

회사란 그런 곳이었다. 오전에는 회의를 했고, 오후에는 자료를 고쳤다. 누군가 물었다.

“민서 대리님, 이거 오늘까지 가능하죠?” “네. 가능합니다.” 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결국 해야 했으니까.

퇴근 직전, 휴대전화가 울렸다. 대학교 친구 단체방이었다. [수진이 결혼합니다♥]

모바일 청첩장과 웨딩사진이 올라왔다. 메시지가 줄줄이 달렸다. 너무 예쁘다ㅠㅠ

드디어 가는구나ㅋㅋㅋㅋ 신혼여행 어디 가? 민서도 적었다.

축하해♥ 진짜 예쁘다 수진이는 좋은 친구였다. 진심으로 축하했다.

조금 뒤에는 고등학교 친구에게서 아기 사진이 왔다. 이번에는 둘째였다. 오늘 아침에 낳았어. 드디어 끝ㅠㅠ

민서는 또 축하한다고 답했다. 요즘 휴대전화에는 그런 소식이 많았다. 결혼.

임신. 출산. 돌잔치.

집들이. 반대로 이혼 소식도 있었다. 대학교 동기 현주는 결혼 3년 만에 이혼했다.

남편이 결혼 전에 숨긴 빚이 있었다고 했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민서는 한동안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주변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가끔 현주가 떠올랐다.

그래. 아무나 만날 바엔 혼자가 낫지. 그 생각을 하면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퇴근 준비를 하는데 옆자리 세린이 물었다.

(세린) : “대리님, 오늘 금요일인데 뭐 하세요?”

(민서) : “집 가.”

(세린) : “약속 없으세요?”

(민서) : “응.”

(세린) : “요즘 러닝크루 같은 거 많이 하던데. 제 친구 거기서 남친 만났어요.”

(민서) : “러닝?”

(세린) : “네. 주말 아침에 다 같이 뛰고 브런치 먹고 그래요.”

민서는 잠깐 생각했다. 나쁘지 않아 보였다. 사람도 만나고 운동도 하고.

지하철을 타자마자 검색해봤다. 서울 직장인 러닝크루 가장 먼저 뜬 모집글을 눌렀다.

토요일 오전 7시 30분 집결 민서는 화면을 잠깐 바라봤다. 주말에도 일찍 일어나?

그대로 창을 닫았다. 사람을 만나려면 뭔가를 해야 했다. 소개팅 앱을 켜든,

동호회를 가든, 러닝을 뛰든. 그런데 그런 걸 하려고 마음먹는 것부터 피곤했다.

그렇다고 주말 내내 집에 있으면 저녁쯤에는 또 그런 자신이 한심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를 만나자고 하기는 귀찮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 외로웠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걷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응.”

— 퇴근했어?

“응. 집 가는 중.”

— 내일 뭐 해?

“몰라.”

— 또 집에 있을 거야?

민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 그러니까 사람을 만나야지. 너 언제까지 회사 집, 회사 집 할 거야?

“만날 사람이 있어야 만나지.”

— 엄마 아는 분이 소개해준다는데 한번 나가볼래?

“몇 살인데?”

— 마흔하나.

민서는 잠깐 침묵했다. “엄마.”

— 왜. 요즘 여섯 살 차이가 뭐가 많아.

“그 사람은 왜 마흔하나까지 결혼 안 했대?”

— 너는 왜 서른다섯까지 안 했는데?

할 말이 없었다. 민서는 전화를 귀에서 떼었다. “나 집 도착했어. 끊을게.”

— 너 진짜 그러다—

통화를 종료했다. 집에 들어와 불을 켰다. 작은 오피스텔이었다.

혼자 살기에는 충분했다. 역도 가깝고, 회사까지도 멀지 않았다. 전세였다.

민서는 몇 년을 모은 돈에 대출을 조금 보태 이 집에 들어왔다. 처음 계약했을 때는 뿌듯했다. 그런데 얼마 전 일찍 결혼한 친구가 아파트를 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맞벌이하면서 남편과 거의 8년을 같이 모았다고 했다. 친구가 집 사진을 보내왔다. 민서는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러고 나서 자기 집을 한번 둘러봤다. 현관에서 몇 걸음만 걸으면 침대가 있었고, 침대에서는 냉장고가 보였다. 나도 스물여덟쯤 결혼했으면 지금 집 하나쯤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현주를 떠올렸다. 빚을 숨긴 남자와 결혼해서 3년 만에 이혼한 현주.

그래. 혼자가 낫지. 민서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혼자 살기에는 이 집도 충분했다. 월급도 혼자 먹고살 만큼은 됐다.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편했다. 정말 편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말이 가끔 자기위로처럼 들렸다.

토요일. 눈을 떴을 때 오후 12시 48분이었다. 휴대전화를 봤다.

친구 하나는 아이와 키즈카페에 있었고, 다른 친구는 신혼집 가구를 보러 다니고 있었다. SNS에는 아침부터 한강을 뛰었다는 사람이 있었고,

등산 정상에서 사진을 찍은 사람도 있었다. 민서는 잠깐 생각했다. 나도 뭐라도 해야 하나.

책장 한쪽에 얼마 전 사둔 책이 보였다. 《퇴근 후 2시간이 당신의 미래를 바꾼다》 제목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책을 꺼냈다. 십여 페이지쯤 읽었다. 직장인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미래를 준비하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라고 했다.

민서는 책을 덮었다. 회사 일을 더 잘하면 뭐가 달라지지. 승진 대상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업무를 더 잘한다고 다음 달 월급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퇴근한 뒤까지 회사에서 쓸 능력을 개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았다. 점심을 배달시켰다.

(민서) : “문 앞에 두고 가주세요.”

밥을 먹고 드라마를 틀었다. 보다가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오후 5시 36분. 민서는 한동안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오늘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

한 말이라고는, “문 앞에 두고 가주세요.” 그게 전부였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뭘 기다리고 있지? 결혼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승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퇴사를 꿈꾸는 것도 아니었다. 특별히 이루고 싶은 것도 없었다.

불행한가? 그건 아니었다. 직장도 있었고,

집도 있었고, 건강했고,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행복하냐고 물으면,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냥 별일이 없었다.

오늘도. 어제도. 아마 다음 주도.

민서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검색창에 썼다. 35세 미혼 여자

몇 개를 보다 껐다. 다시 썼다. 혼자 살면 노후

또 껐다. 한참 후 다시 검색창을 열었다. 이번에는 이렇게 썼다.

사는 게 재미없을 때 운동. 취미.

여행. 명상. 사람을 만나라.

새로운 것을 배워라. 이미 한 번쯤 생각해본 것들이었다. 스크롤을 내리다가 손가락이 멈췄다.

1박 2일 템플스테이 잠시 멈춰 나를 바라보는 시간 민서는 사진을 바라봤다. 산.

절. 나무. 사람도 별로 없어 보였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신청 페이지를 눌렀다. 이번 주말.

남은 자리 1명. 민서는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결제했다.

[템플스테이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 문자가 오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내가 왜 이걸 했지?”

민서는 예약 화면을 다시 열었다. 취소 버튼도 있었다. 손가락을 올렸다가 멈췄다.

그렇다고 취소하고 나면, 이번 주말에도 또 집에 있을 것 같았다. 늦게 일어나고,

배달을 시켜 먹고,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주말.

민서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취소하지 않았다. 절에 가서 뭘 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종교도 없었고, 108배를 해본 적도 없었다. 솔직히 조금 후회됐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이라도. 민서는 예약 문자를 다시 한번 봤다.

이번 주 토요일. 1박 2일. 한숨이 나왔다.

“진짜 가야 되네.” 그렇게 민서는, 나를 돌아보겠다는 문구 같은 거창한 결심도 없이

그저 똑같은 주말에서 한번 도망쳐보려고 산으로 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