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6 / 10
금요일 오후. 민서는 회의실에서 나오다가 옆 팀 도윤과 마주쳤다.
(도윤) : “회의 끝났어요?”
(민서) : “네. 겨우요.”
(도윤) : “표정은 아직 회의 중인 것 같은데.”
민서가 피식 웃었다. 평소에도 이 정도였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하고,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다 몇 마디 나누는 사이. 민서는 무심코 도윤의 머리 위를 봤다. 3
처음 숫자가 보였을 때부터 크게 달라지지 않은 숫자였다. 나한테는 관심 없는 사람. 그때 뒤에서 세린이 나타났다.
(세린) : “대리님, 오늘 저녁 뭐 하세요?”
(민서) : “왜?”
(세린) : “술 마셔요.”
(민서) : “누구랑?”
세린이 손가락으로 도윤을 가리켰다.
(세린) : “도윤 대리님, 하진 대리님. 넷이요.”
(도윤) : “저는 방금 저도 모르게 섭외된건가요?.”
(세린) : “섭외 성공이죠? 도윤대리님?”
민서는 잠깐 생각했다. 준호는 오늘 회식이 있었다.
(민서) : “그래. 가자.”
세린이 눈을 크게 떴다.
(세린) : “요즘 진짜 달라지셨어요.”
(민서) : “뭐가.”
(세린) : “연애의 힘인가.”
민서가 세린을 쳐다봤다.
(민서) : “너 그걸 어떻게 알아?”
세린이 웃었다.
(세린) : “옆자린데 다 알죠~”
회사 근처 고깃집. 맥주가 한 잔씩 돌고, 고기가 반쯤 없어졌을 때 세린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세린) : “그래서 어떤 사람이세요?”
민서는 고기를 집다가 멈췄다.
(민서) : “누가?”
(세린) : “남자친구요.”
(하진) : “이거 물어보려고 모았구나.”
(세린) : “궁금하잖아요.”
민서는 잠깐 생각했다.
(민서) : “그냥… 괜찮은 사람이야.”
(세린) : “그게 뭐예요.”
(민서) : “회사도 괜찮고. 집도 있고. 성격도 차분하고.”
(세린) : “잘생겼어요?”
(민서) : “멀쩡해.”
(세린) : “대리님 기준으로 멀쩡이면 괜찮은데.”
하진이 웃었다.
(하진) : “조건 좋네요.”
민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조건은 좋았다.
그리고 자신을 좋아했다. 아주 많이. 세린이 다시 물었다.
(세린) : “대리님은요?”
(민서) : “뭐가.”
(세린) : “얼마나 좋아요?”
민서는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얼마나. 이상하게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민서) : “만난 지 얼마 안 됐어.”
(세린) : “그래도요.”
(민서) : “나를 많이 좋아해줘.”
세린은 잠깐 민서를 바라봤다.
(세린) : “저는 그런 거 부러워요.”
(민서) : “뭐가?”
(세린) : “나를 더 좋아해주는 사람 만나는 거.”
민서의 손이 잠깐 멈췄다. 준호의 숫자가 떠올랐다. 100
(세린) : “저는 제가 더 좋아하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하진) : “그건 다 그렇지 않나.”
(세린) : “그러니까요. 나 좋다는 사람이 최고예요.”
세린이 갑자기 도윤 쪽을 봤다.
(세린) : “도윤 대리님은요?”
도윤은 고기를 뒤집고 있었다.
(도윤) : “뭐가요.”
(세린) : “내가 더 좋아하는 연애랑, 나를 더 좋아하는 연애.”
도윤은 잠깐 생각했다.
(도윤) : “제가 더 좋아하는 쪽.”
민서가 고개를 들었다. 세린도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세린) : “왜요?”
(도윤) : “내가 좋아해야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도윤) : “상대가 나를 아무리 좋아해도 내가 마음이 없으면 그게 연애가 되나.”
민서는 말없이 맥주잔을 들었다.
(세린) : “그래도 내가 더 좋아하면 불안하잖아요.”
(도윤) : “그럴 수도 있죠.”
도윤이 어깨를 조금 으쓱했다.
(도윤) : “안 좋아하는 사람 만나는 것 보단 낫지 않아요?”
민서는 도윤을 바라봤다. 말을 거창하게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자기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 말하는 사람.
(세린) : “그럼 조건은 안 봐요?”
(도윤) : “보죠.”
세린이 바로 웃었다.
(세린) : “역시.”
(도윤) : “근데 결혼이면 몰라도.”
도윤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도윤) : “연애 시작하기 전에 조건표부터 만들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하진) : “세린 씨 실망했는데.”
(세린) : “아니거든요.”
(도윤) : “연애하는데 재산세 내는지 부터 물어보면무섭잖아요.”
민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진) : “재산세 물어보면 결혼정보회사 아닌가.”
세린이 손사래를 쳤다.
(세린) : “아, 저 그렇게까지 안 봐요.”
민서는 한참 웃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도윤이 생각보다 웃긴 사람이라서인지.
아니면 그냥, 대화가 재미있어서인지. 잘 모르겠다. 술자리가 끝나고 네 사람은 역 쪽으로 걸었다. 세린과 하진이 앞서갔다.
민서와 도윤은 자연스럽게 조금 뒤에 남았다.
(도윤) : “오늘 많이 웃으시네요.”
(민서) : “제가 원래 잘 웃어요.”
(도윤) : “회사에서는 잘 모르겠던데.”
(민서) : “회사에서 웃을 일이 있어야죠.”
(도윤) : “그건 인정.”
민서가 또 웃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갈라졌다.
(민서) : “월요일에 봬요.”
(도윤) :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민서는 돌아섰다. 몇 걸음쯤 걸은 뒤, 자기도 모르게 한번 뒤를 봤다.
도윤은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머리 위 숫자는 여전히 3
이었다. 지하철에 앉자 오늘 했던 대화가 하나씩 떠올랐다. 상대가 나를 아무리 좋아해도 내가 마음이 없으면 그게 연애가 되나.
그리고 재산세. 민서는 또 피식 웃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준호 : 회식 끝났어요?]
민서는 화면을 바라봤다. 잠시 전까지 남아 있던 웃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민서 : 네. 지금 집 가는 중이에요.]
답장을 보내고 휴대전화를 내려놨다. 준호는 자신을 100
좋아했다. 도윤은 3
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3인 사람과의 시간이 더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