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건너는 해
오늘 나는 단추 하나를 주웠다

에피소드 1 / 50

종이에는 냄새가 있다.

깨끗한 종이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을 것 같지만, 코를 가까이 대면 묽은 풀과 마른 먼지가 섞인 냄새가 난다. 오래된 서류철에서 꺼낸 종이는 거기에 사람 손의 기름과 습기 냄새가 더해진다.

내 앞에 놓인 것은 새 종이였다.

교정본부라는 글자가 오른쪽 위에 회색으로 찍혀 있었다. 종이 아래에는 작성자의 수용번호와 이름을 적는 칸이 있었고, 그 밑으로 가석방 심사 참고자료라는 제목이 굵은 글씨로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이름부터 썼다.

한재호.

볼펜 끝이 ‘호’의 마지막 획에서 조금 미끄러졌다. 오른손에 힘이 빠진 것은 아니었다. 책상 높이가 휠체어에 맞지 않았다. 팔꿈치를 책상 위로 올리면 어깨가 올라갔고, 손목을 꺾어야 글씨를 쓸 수 있었다.

“불편합니까?”

맞은편에 앉은 교정위원이 물었다.

그의 이름은 서기현이었다. 가슴에 달린 명찰을 두 번 확인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마흔 중반쯤 되어 보였고, 머리를 짧게 잘랐다. 안경테가 얇았다. 서류를 넘길 때마다 엄지에 침을 묻히는 습관이 있었다.

“괜찮습니다.”

나는 어깨를 조금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괜찮지 않았지만, 책상을 바꿔달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교도소에서 괜찮다는 말은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었다. 더 이상 조치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뜻에 가까웠다.

서기현은 내가 적은 이름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수용번호도 적으셔야 합니다.”

나는 이름 위 칸으로 볼펜을 옮겼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수용번호를 자꾸 틀렸다. 병원에서는 환자번호로 불렸고, 재판에서는 피고인 한재호였으며, 회사에서는 한 부장 또는 한 피엠이었다. 집에서는 아빠였고, 수진에게는 오빠였다. 사람을 부르는 말은 장소에 따라 달라졌지만, 그 말들이 같은 사람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나는 오래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은 수용번호를 틀리지 않는다.

네 자리 숫자를 쓰는 데 이름보다 시간이 덜 걸렸다.

서기현은 내 손이 멈추자 종이 아래쪽을 가리켰다.

“질문은 세 가지입니다. 다 작성하실 필요는 없고, 한 가지를 골라 서술하셔도 됩니다.”

질문은 이미 읽었다.

첫째, 범행 당시의 판단과 행동을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하십시오.

둘째, 피해 회복과 사회 복귀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였는지 서술하십시오.

셋째, 수감생활을 통해 발견한 삶의 새로운 의미와 향후 실천 계획을 서술하십시오.

세 번째 문장이 가장 길었다.

삶의 새로운 의미.

나는 그 말을 속으로 읽었다. 새롭다는 말은 이전의 것이 낡았다는 뜻이었다. 발견했다는 말은 원래부터 어딘가에 놓여 있었다는 뜻이었다. 삶의 의미는 숲속에 떨어진 지갑이나 창고 구석의 재고품처럼 찾기만 하면 되는 것 같았다.

“심사위원들이 글을 잘 썼는지 평가하는 건 아닙니다.”

서기현이 말했다.

“솔직하게 쓰시면 됩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종이 오른쪽 위의 교정본부 글자를 보았다.

솔직하게 쓰십시오.

회사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사고원인 조사회의 첫날, 법무팀장이 회의실 문을 닫고 말했다.

있는 그대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그 뒤 그는 화이트보드에 ‘설계’, ‘시공’, ‘관리’, ‘불가항력’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참석자들의 말을 네 개의 항목 안에 넣었다.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 말은 지웠다.

사람들은 솔직하게 말하라고 한 뒤, 솔직함이 들어갈 칸을 먼저 만든다.

나는 볼펜 뚜껑을 왼손으로 만졌다. 뚜껑 끝에 이빨 자국이 있었다. 내가 문 것은 아니다. 교육실에서 공동으로 쓰는 볼펜이었다. 누군가 생각이 나지 않을 때 물었거나, 분노를 참으려고 깨물었거나, 그냥 입에 무언가를 대는 습관이 있었을 것이다.

“작성 시간은 한 시간입니다.”

서기현이 말했다.

“다 쓰지 못해도 의료동으로 가져가셔서 계속 쓰실 수 있습니다. 다음 주 상담 때 초안을 보겠습니다.”

옆자리에서는 누군가 이미 글을 쓰고 있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일정했다. 두 칸 건너편에 앉은 남자는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종이가 찢어질 것처럼 볼펜을 눌렀다. 반대쪽에서는 한 사람이 첫 줄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지우개가 없어서 볼펜으로 검게 덧칠했다.

나는 첫 번째 질문을 다시 읽었다.

범행 당시의 판단과 행동을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하십시오.

‘범행 당시’라는 말이 목에 걸렸다.

사고 당시가 아니었다.

작업 당시도 아니었다.

붕괴 당시도 아니었다.

범행 당시.

나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곧이어 법원에서 이미 확정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과 확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동시에 존재했다.

볼펜을 종이에 댔다.

나는,

두 글자를 썼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나는 당시 현장 총괄책임자로서.

이렇게 이어갈 수 있었다.

안전보다 공사 일정을 우선하였고.

위험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작업을 승인하여.

두 명의 소중한 생명이.

문장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판결문과 반성문과 회사 사과문에서 여러 번 읽었다. 단어의 순서를 조금만 바꾸면 완성할 수 있었다.

나는 당시 현장 총괄책임자로서 안전보다 공사 일정을 우선하여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정확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 문장 안에는 그날이 없었다.

그날의 공기는 눅눅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콘크리트 바닥에서 물 냄새가 올라왔다. 이동식 발전기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졌다. 안전모 안쪽으로 땀이 흘렀고, 휴대전화는 십 분마다 울렸다.

그날 내 휴대전화 화면에는 아내의 메시지도 있었다.

유리 장난감 사오는 거 잊지 마.

나는 읽고도 답하지 않았다.

오후 회의가 끝나면 답하려 했다. 회의가 끝나면 현장소장과 통화하고, 현장소장과 통화한 뒤 시공사 보고서를 확인하고, 그 다음에는 본부장에게 공정률을 보고해야 했다.

유리의 장난감은 그 뒤에 있었다.

세상은 언제나 다음 순서가 있을 것처럼 배열되어 있었다.

“한재호 씨.”

서기현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통증이 있습니까?”

볼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검지 관절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닙니다.”

“필요하면 의료동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오늘 세 번째 괜찮다는 말이었다.

나는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뒤에 쉼표를 찍어놓은 것처럼 볼펜 자국이 하나 남아 있었다. 잉크가 번져 작은 검은 점이 되었다.

그 점을 보다가 붕괴 직전의 기둥을 떠올렸다.

기둥 표면에는 머리카락보다 가는 선이 있었다. 균열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애매한 정도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선을 문질렀다. 먼지가 묻어나왔다. 현장소장은 표면 건조 과정에서 생긴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안전점검 담당자는 전화로 말했다.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연결부 변위가 기준치에 근접해 있습니다.”

나는 물었다.

“근접한 겁니까, 초과한 겁니까?”

“초과는 아닙니다.”

“사용 중지 기준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죠?”

잠시 침묵이 있었다.

“수치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다만 야간 하중 작업은 미루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원한 대답은 앞 문장이었다. 그가 강조한 것은 뒷 문장이었다.

나는 앞 문장을 기록했다.

사용 중지 기준 미해당.

뒷 문장은 회의록에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누락이었을까.

요약이었을까.

그때 나는 요약이라고 생각했다.

내 손은 종이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 시간이 끝났을 때 내가 쓴 것은 이름과 수용번호, 그리고 ‘나는’뿐이었다.

서기현은 종이를 회수하지 않았다.

“가져가십시오.”

그가 말했다.

“처음에는 다들 어렵습니다.”

다들.

그 말은 위로처럼 들렸지만, 실제로는 분류였다. 나는 글을 쓰지 못하는 수용자들 안에 들어갔다.

“다음 상담 때는 한 문단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그는 볼펜을 거두려다 내가 아직 쥐고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멈췄다.

“그것도 가져가셔도 됩니다.”

“공동물품 아닙니까?”

“반납은 다음에 하시면 됩니다.”

나는 볼펜과 종이를 무릎 위의 서류판에 올렸다. 종이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왼손으로 눌렀다.

나도윤 교도관이 교육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 휠체어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 나는 전동휠체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의료동 복도 일부에 턱이 있었고, 충전 관리도 번거로웠다. 손으로 바퀴를 미는 방식이 더 자유롭다고 생각했지만, 어깨가 아픈 날에는 그 선택이 자유인지 고집인지 알 수 없었다.

“직접 가시겠습니까?”

나도윤이 물었다.

“네.”

“경사로에서만 잡겠습니다.”

나는 바퀴 테두리를 밀었다.

교육동과 의료수용동 사이에는 짧은 복도가 있었다. 일반 수용동으로 이어지는 길과 겹치는 구간에서는 철문을 세 번 통과해야 했다. 문이 열릴 때마다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첫 번째 철문 앞에서 우리는 기다렸다.

반대쪽에서 수용자들이 작업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회색 수용복이 줄을 이루었다. 몇몇은 내 휠체어를 힐끗 보았고, 대부분은 보지 않았다.

처음 수감됐을 때 사람들의 시선을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누가 내 다리를 보는지.

누가 내 얼굴을 알아보는지.

누가 뉴스를 보았는지.

시간이 지나자 시선은 줄어들었다. 정확히는 내가 세는 일을 그만두었다.

문이 열렸다.

경사로에서 나도윤이 휠체어 뒤를 잡았다.

“제가 밀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경사도 규정 때문입니다.”

그는 나를 도와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규정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말이 편했다.

도움에는 때때로 표정이 붙었다. 불쌍하다는 표정, 선행을 했다는 표정, 내가 감사해야 한다는 표정. 규정에는 표정이 없었다.

의료동에 도착했을 때 점심 배식이 끝나가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이정호가 침대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었다. 성경은 여러 번 테이프로 붙인 흔적이 있었다. 표지의 금박 글씨는 거의 벗겨졌고, 책등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글 잘 쓰고 왔나?”

정호가 물었다.

“아니요.”

“한 글자도?”

“두 글자 썼습니다.”

“두 글자면 시작은 했구먼.”

나는 서류판을 침대 옆 탁자에 놓았다.

“무슨 글자인지는 안 물어보십니까?”

“자네가 말하고 싶으면 하겠지.”

정호는 그렇게 말한 뒤 곧바로 물었다.

“뭐라고 썼는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웃었다. 앞니 하나가 없었다.

“나는 첫 반성문에 열두 장을 썼어.”

“기억하십니까?”

“그럼. 사람 죽여놓고 내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열두 장을 썼지.”

정호는 성경 사이에 끼워둔 종이 조각을 정리했다.

“아버지는 술꾼이었고, 어머니는 나를 때렸고, 나는 배운 게 없었고, 마누라는 입만 열면 사람을 무시했고. 열두 장을 다 읽으면 내가 사람 하나 죽인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어.”

“지금은 다르게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열세 장 쓸 수 있지.”

“한 장이 늘었네요.”

“마지막 한 장에 내가 죽였다고 쓰는 거야.”

나는 휠체어를 침대 옆으로 돌렸다.

“앞의 열두 장은 그대로 두고요?”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정호는 성경을 덮었다.

“사람이 왜 그랬는지를 말하는 것과 그래서 안 그랬다는 건 다른 말이야.”

“저한테 하시는 말씀입니까?”

“내 이야기를 했네.”

“저를 보고 하셨잖습니까.”

“눈이 앞에 달렸으니까 자네를 보지, 벽을 보고 말하나?”

정호의 말에는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 특유의 태도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오래 살았고 오래 갇혀 있었다는 이유로 사람의 마음을 많이 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점이 싫었다.

그와 같은 방을 쓴 지 넉 달째였지만, 어떤 날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피곤했다. 그는 아침마다 기도했고, 내가 잠들지 못하고 있으면 성경 구절을 읽었다.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박진수와 오광철은 버렸다는 뜻처럼 들렸다.

나는 그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정호는 사흘 동안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점심 식판은 미지근했다. 밥과 된장국, 어묵볶음, 김치가 나왔다. 나는 침대 옆 이동식 테이블을 앞으로 당겼다. 상체를 숙일 때마다 허리 아래에서 아무 감각도 없는 몸이 뒤늦게 따라왔다.

사고 후 의사는 내게 감각 수준을 설명했다.

배꼽 아래.

그 말은 지도에 선을 긋는 것처럼 간단했다. 선 위에는 내가 있었고, 선 아래에도 내 몸이 있었다. 그러나 아래쪽 몸은 내가 명령해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파도 내가 느끼지 못했다.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욕창은 통증 없이 생겼다. 방광은 신호 없이 차올랐다. 다리는 스스로 경련했다. 내 몸은 나에게 알리지 않고 상태를 바꾸었다.

정호가 국을 마시다 기침했다.

그의 수용복 윗단추 하나가 느슨하게 매달려 있었다. 실밥이 반쯤 풀린 상태였다.

“그거 떨어지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정호는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나중에 꿰매야겠네.”

“지금 간호사한테 말씀하시죠.”

“단추 가지고 간호사를 불러?”

“떨어지고 나서 찾는 것보다 낫습니다.”

“자네는 모든 걸 떨어지기 전에 막았나?”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정호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러나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사과 대신 김치를 집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그런 말은 안 하셔도 됩니다.”

“알았네.”

그 뒤로 우리는 밥을 먹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판을 반납한 뒤 나는 침대로 옮겨갔다. 휠체어에서 침대로 이동할 때는 두 손으로 몸을 들어야 했다. 왼손을 매트리스에 짚고 오른손으로 휠체어 팔걸이를 밀었다. 엉덩이를 들어 옆으로 옮기는 동안 다리는 바닥에 놓인 물건처럼 따라왔다.

오늘은 한 번에 되지 않았다.

몸이 중간에 걸렸다. 오른쪽 허벅지가 휠체어 바퀴에 닿았다.

정호가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가만히 계세요.”

내가 말했다.

“도와주려고.”

“도움 안 됩니다.”

말이 너무 빨리 나갔다.

정호는 다시 앉았다.

나는 팔에 힘을 주었다. 두 번째에는 몸이 침대 위로 올라갔다. 다리를 손으로 하나씩 들어 침대에 놓았다. 오른쪽 발목이 바깥쪽으로 꺾여 있었다. 손으로 바로잡았다.

내 발은 차가웠다.

손바닥으로 만지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나는 누워 천장을 보았다.

천장에는 길게 이어진 균열이 하나 있었다. 페인트가 갈라진 것이지 구조적인 균열은 아니었다. 처음 방에 왔을 때 시설 담당자가 그렇게 설명했다.

구조적인 문제는 없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웃을 뻔했다.

구조적이라는 말은 어디에나 있었다.

구조적 원인.

구조적 비리.

구조적 압박.

구조적 책임.

사람들이 구조를 말할 때 개인은 작아졌다. 개인을 말할 때 구조는 사라졌다.

법정에서 검사는 말했다.

“피고인은 최종 작업승인 권한을 가진 현장책임자였습니다.”

변호사는 말했다.

“실질적인 의사결정은 본사 경영진의 공기 단축 지시에 의해 제한되었습니다.”

둘 다 사실이었다.

나는 최종 작업승인 권한자였다.

나는 공기 단축 압박을 받았다.

어느 문장도 다른 문장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재판은 문장을 경쟁시켰다.

더 강한 문장이 판결문에 남았다.

오후 두 시가 지나자 창살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빛은 바닥에 작은 사각형을 만들었다. 의료동 창문은 남서쪽을 향하고 있어서 오후에만 햇빛이 들었다. 처음에는 계절마다 빛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이 신기했다. 나중에는 그 위치로 시간을 짐작하게 되었다.

빛의 오른쪽 끝이 세 번째 바닥 타일의 금을 넘으면 두 시 반이었다.

침대 다리에 닿으면 세 시 십 분.

벽 아래까지 가면 네 시가 가까웠다.

시계가 없어도 시간은 지나갔다.

나는 탁자 위의 종이를 바라보았다.

멀리서는 ‘나는’이라는 두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종이는 다시 빈 종이처럼 보였다.

정호가 낮잠을 자다가 몸을 돌렸다.

작은 소리가 났다.

딱.

단단한 것이 바닥에 부딪친 뒤 두 번 굴렀다.

정호의 수용복에서 단추가 떨어져 있었다.

단추는 침대 아래로 들어가지 않고 두 침대 사이에 멈췄다. 회색 플라스틱 단추였다. 구멍이 네 개 있었고, 한쪽에 흰 실이 붙어 있었다.

정호가 몸을 일으켰다.

“떨어졌네.”

“그러게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러게.”

그는 침대 가장자리로 몸을 옮겼다. 허리를 숙이려 했지만 손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가지 않았다. 정호는 오래전 허리 수술을 받았고, 요즘에는 고관절 통증도 심했다.

그는 오른손을 뻗었다.

손끝과 단추 사이에는 손바닥 하나 정도의 거리가 남았다.

“조금만 더 오면 되겠는데.”

정호가 중얼거렸다.

“떨어집니다.”

“안 떨어져.”

그는 더 숙였다.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나는 침대 난간을 잡았다.

“그만하세요.”

“거의 닿았어.”

“정호 아저씨.”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휠체어를 보았다. 침대 옆에 세워져 있었다. 휠체어 뒤쪽에는 물건을 집는 긴 집게가 걸려 있었다. 간호사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울 때 쓰라고 준 것이었다.

침대에서 휠체어로 다시 옮기는 일은 번거로웠다.

호출벨을 누르면 교도관이나 간호사가 올 수 있었다. 단추 하나 때문에 부르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음 배식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다.

단추가 없어도 정호의 수용복은 벌어지지 않았다. 위아래 단추가 남아 있었다.

나는 잠시 단추를 보았다.

정호도 단추를 보았다.

두 사람 모두 가까이 갈 수 없는 물건을 가운데 두고 있었다.

이상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은 걸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은 허리를 굽힐 수 없었다.

단추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바닥에 있었다.

“그냥 두십시오.”

내가 말했다.

“청소할 때 쓸려가.”

“새 단추 받으면 되잖습니까.”

“저게 새 단추야.”

“단추에 새것과 헌것이 어디 있습니까?”

“저건 구멍도 네 개 다 멀쩡하고 색도 안 바랬어.”

정호는 다시 손을 뻗었다.

“사람 불러야겠네.”

“단추 하나 때문에요?”

“단추 하나라도 내가 못 줍잖아.”

그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나는 휠체어를 다시 보았다.

사고 직후 병원에서 재활의학과 의사는 내게 독립생활을 설명했다.

혼자 침대에서 휠체어로 이동하는 것.

혼자 소변을 처리하는 것.

혼자 바닥의 물건을 줍는 것.

혼자 문턱을 넘는 것.

그는 독립이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했다.

나는 그 말을 싫어했다.

사고 전에도 나는 혼자 살지 않았다. 수진이 밥을 했고, 직원이 일정을 잡았고, 운전기사가 공항에 데려다줬다. 현장에서는 작업자들이 내가 지시한 일을 했다.

그때는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불렸다.

지금은 단추 하나를 줍기 위해 집게가 필요했다.

나는 팔로 몸을 일으켰다.

“뭐 하게?”

정호가 물었다.

“비키세요.”

나는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겼다. 이번에는 몸이 한 번에 움직였다. 발판 위에 다리를 올리고 브레이크를 풀었다.

두 번 바퀴를 밀자 단추 앞에 도착했다.

집게를 잡았다.

손잡이를 누르자 집게 끝이 닫혔다. 단추를 정확히 집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첫 번째에는 흰 실만 잡혔다. 들어 올리자 실이 풀리며 단추가 다시 떨어졌다.

정호가 말했다.

“천천히 해.”

“말 안 하셔도 됩니다.”

두 번째에는 단추 가장자리를 잡았다. 집게를 들어 올리자 단추가 중간에서 빠져 침대 다리 쪽으로 굴렀다.

“이거 사람 성질 시험하네.”

정호가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휠체어를 조금 돌렸다.

세 번째에는 집게 끝을 단추 구멍 안으로 넣었다. 손잡이를 누르자 단추가 비스듬히 걸렸다. 천천히 들어 올렸다.

단추는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정호의 침대 위에 놓았다.

정호가 단추를 집어 손바닥에 올렸다.

“고맙네.”

“간호사 오면 꿰매달라고 하세요.”

“내가 꿰맬 수 있어.”

“바늘은 반입 안 됩니다.”

“의료동에는 있잖아.”

“그러니까 간호사에게 말씀하시라고요.”

정호는 단추를 베개 옆에 놓았다.

“알았네.”

나는 휠체어를 돌렸다.

탁자 위의 종이가 햇빛에 반쯤 들어가 있었다. 빛 속의 종이는 더 하얗게 보였고, 그 위의 검은 글씨는 멀리서도 보였다.

나는.

나는 책상 앞으로 갔다.

볼펜을 들었다.

첫 번째 질문 아래에 쓰려다가 멈췄다. 두 번째 질문도 아니었다. 세 번째 질문 아래의 빈칸에 볼펜을 댔다.

수감생활을 통해 발견한 삶의 새로운 의미와 향후 실천 계획을 서술하십시오.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쓸 수 있었다.

삶에는 의미가 없다고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너무 큰 문장이었다.

나는 삶 전체를 본 적이 없었다. 내 삶도 끝나지 않았고, 박진수와 오광철의 삶도 내가 아는 부분보다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내가 의미가 없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사고는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쓰려다가 멈췄다.

사고가 의미 없다는 말은 두 사람의 죽음이 무의미했다는 말처럼 보일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권리도, 의미가 없다고 결론 내릴 권리도 없었다.

나는 볼펜을 내려놓았다.

“또 못 쓰겠나?”

정호가 물었다.

나는 조금 전 바닥을 보았다.

단추는 없었다.

그 자리에 창살을 통과한 빛이 걸쳐 있었다.

나는 볼펜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썼다.

오늘 나는 단추 하나를 주웠다.

문장은 짧았다.

새로운 의미도 없었다.

교훈도 없었다.

내가 왜 단추를 주웠는지는 쓰지 않았다. 정호를 돕기 위해서였는지, 내가 아직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는지, 단추를 그대로 두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단추는 바닥에 있었고, 나는 그것을 주웠다.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한 오늘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었다.

정호가 물었다.

“뭐라고 썼나?”

“한 문장 썼습니다.”

“읽어봐.”

“싫습니다.”

“좋은 문장인가?”

나는 종이를 한 번 읽었다.

오늘 나는 단추 하나를 주웠다.

“모르겠습니다.”

“그럼 솔직한 문장이네.”

“솔직한지는 어떻게 압니까?”

정호는 베개 옆의 단추를 들어 보였다.

“저게 있으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빛은 종이 위를 지나 내 손등에 닿았다. 손등의 핏줄과 오래된 주삿바늘 자국이 선명해졌다. 조금 뒤에는 그 빛도 손에서 벗어날 것이다.

나는 종이를 접지 않았다.

탁자 위에 그대로 두었다.

그날 내가 쓴 것은 한 문장이었다.

그 문장이 나를 설명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를 바꿀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심사위원들이 좋아할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빈 종이는 더 이상 비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정호의 단추는 베개 옆에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