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9 / 10
32억을 둘이 함께 알게 된 뒤에도 다음 날 아침은 평소와 같았다.
남편은 출근 준비를 했고, 서윤은 아이 아침을 챙겼다.
(남편) : “나 다녀올게.”
(서윤) : “응. 다녀와.”
아이는 우유를 마시며 손을 흔들었다.
현관문이 닫히자 서윤은 잠깐 웃었다.
이상했다. 오늘도 똑같이 아침이었다.
가장 먼저 한 건 대출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숫자가 사라지는 걸 직접 보니 서윤은 오히려 조금 멍해졌다.
그동안 몇 년을 따라다니던 대출금.
매달 빠져나가는 돈을 보며 항상 계산해야 했던 숫자였다.
그게 한 번에 없어졌다.
남편은 화면을 한참 보다가 말했다.
(남편) : “와… 진짜 끝났네.”
서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 : “응. 끝났네.”
그 말이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대출 하나가 끝난 것뿐인데 둘 다 어깨가 조금 내려간 것 같았다.
양가 부모님께도 같은 금액을 드렸다.
부모님들은 왜 이렇게 큰 돈이 생겼는지 물었고, 받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로또 이야기를 듣고는 몇 번이나 사실이냐고 다시 물었다.
며칠 동안은 가족 단체방이 조용할 틈이 없었다.
그 시간이 지나자 다시 일상이 돌아왔다.
남편은 자기 몫의 30%를 받고도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서윤이 먼저 물었다.
(서윤) :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남편) : “있긴 하지.”
(서윤) : “뭔데?”
남편은 잠깐 뜸을 들였다.
(남편) : “대학원.”
서윤은 예상하지 못한 답에 눈을 깜빡였다.
(서윤) : “대학원?”
(남편) : “응. 예전부터 가고 싶었어.”
회사 다니면서 몇 번 알아본 적이 있었다.
관련 분야를 더 공부하고 싶었고, 언젠가는 학위도 따보고 싶었다.
하지만 등록금도 부담이었고, 회사 다니며 시간을 쓰는 것도 망설여졌다.
무엇보다 지금 회사에서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늘 먼저였다.
(남편) : “괜히 돈 쓰고 시간 쓰다가
회사에서도 애매해질까 봐 그냥 접었지.”
서윤은 남편을 보며 웃었다.
(서윤) : “이제 해.”
(남편) : “진짜?”
(서윤) : “당신 몫이야.”
남편도 웃었다.
며칠 뒤, 남편은 야간 대학원 과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입학 설명회를 찾아보고, 커리큘럼을 비교하고, 오랜만에 책도 샀다.
퇴사할 생각은 없었다.
여전히 회사에 갔고, 회의를 했고, 야근도 했다.
그런데 뭔가 달라졌다.
어느 날 저녁, 남편이 회사 이야기를 하다가 말했다.
(남편) : “오늘 팀장 때문에 진짜 짜증났어.”
예전 같으면 그 뒤에 늘 비슷한 말이 붙었다.
‘그래도 회사는 다녀야지.’ ‘괜히 찍히면 안 되지.’ ‘이직도 쉽지 않고.’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남편) : “싫으면 언젠가 옮기면 되지 뭐.”
서윤은 잠깐 남편을 봤다. 말투가 가벼웠다. 회사에 대충 다니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이 직장을 절대 잃으면 안 된다’는 긴장이 조금 빠진 얼굴이었다.
남편도 돈으로 무언가를 산 것 같았다.
서윤처럼 시간을 산 건 아니었다.
마음의 여유를 샀다.
서윤도 자기 몫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열 개만 샀던 물건을 다른 상품과 함께 조금 더 들여왔다.
사진도 직접 찍어보고, 상세페이지도 다시 만들었다.
처음에는 직접 다 하려고 했다.
상품 등록. 포장. 송장 출력. 문의 답변.
그런데 주문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자 해야 할 일이 금세 늘었다.
하루는 포장하다가 유치원 하원 시간을 놓칠 뻔했다. 서윤은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서윤) : “아, 벌써?”
예전의 ‘벌써?’와는 조금 달랐다.
집안일을 하다 시간이 사라졌을 때는 허무했다.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모자랐다.
서윤은 웃으며 노트북을 닫았다.
필요한 곳에는 돈도 썼다.
상품 사진을 더 잘 찍기 위해 간단한 촬영 장비를 샀다.
혼자 하기 어려운 부분은 외주도 맡겨봤다.
조금 더 배우고 싶은 강의도 들었다.
어떤 선택은 잘 맞았고, 어떤 선택은 실패했다.
(서윤) : “이건 망했네.”
예전 같았으면 돈을 날렸다고 자책하고,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왜 안 팔렸는지 찾아봤다.
가격이 문제였는지. 상품이 문제였는지. 사진이 문제였는지.
그리고 다음 상품을 찾았다.
실패가 끝이 아니었다.
그저 다음 선택을 위한 비싼 수업료 정도였다.
서윤은 그 사실이 좋았다.
어느 평일 저녁.
남편은 회사에서 돌아왔고, 아이는 미술학원에서 만든 그림을 식탁 위에 펼쳐놓았다.
(아이) : “아빠, 이거 내가 그렸어.”
(남편) : “진짜? 잘했는데?”
서윤은 국을 데웠다.
남편은 대학원 모집요강을 휴대전화로 보고 있었고, 서윤의 노트북에는 오늘 들어온 주문 알림이 떠 있었다.
밖에서 보면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집이었다.
남편은 여전히 회사원이었고, 서윤은 여전히 아이를 등하원시켰다.
저녁이면 셋이 같은 식탁에 앉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예전과는 전혀 다른 하루 같았다.
남편은 회사를 잃으면 모든 게 끝날 것 같은 마음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서윤은 실패하면 안 된다는 마음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32억이 둘의 인생을 대신 살아준 것은 아니었다.
대신
남편에게는 생각해볼 여유를 줬고,
서윤에게는 다시 해볼 용기를 줬다.
같은 집이었다.
같은 가족이었다.
그런데 둘의 하루는 조금씩 자기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