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8 / 10
남편이 먼저 눈치챈 건 서윤의 옷이었다.
어느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이 식탁에 앉아 있는 서윤을 보다가 말했다.
(남편) : “요즘 옷 좀 샀네?”
서윤은 잠깐 자기 옷을 내려다봤다.
예전 같으면 유치원 등원에 입었을 늘어진 티셔츠와 운동복 대신, 요즘은 외출할 일이 없어도 마음에 드는 옷을 입는 날이 많았다.
(서윤) : “응. 좀 샀어.”
(남편) : “필라테스도 계속 다니지?”
(서윤) : “응.”
(남편) : “미술학원도 보내고.”
서윤은 대답 대신 물을 마셨다. 남편은 출근 가방을 챙기며 웃었다.
(남편) : “장인어른이 손녀한테 꽤 크게 쓰시네.”
서윤도 따라 웃었다.
(서윤) : “그러게.”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은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변화는 조금씩 늘었다.
가사도우미가 오는 날이면 서윤은 오전부터 집을 나갔다.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가거나, 도매시장에 다녀왔다.
현관 한쪽에는 포장용 봉투와 박스가 생겼다. 택배가 몇 개씩 도착했다.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이 거실에 놓인 박스를 보고 물었다.
(남편) : “이건 뭐야?”
(서윤) : “내가 팔아보려고 산 거.”
(남편) : “뭘 팔아?”
(서윤) : “그냥 작은 거. 온라인으로 한번 해보려고.”
남편은 박스를 한번 보고, 노트북을 한번 봤다.
(남편) : “갑자기 사업?”
(서윤) : “사업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그냥 해보는 거지.”
(남편) : “돈 많이 들어?”
(서윤) : “아니. 일단 작게.”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 : “재밌으면 해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며칠 뒤부터 남편은 조금씩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미술학원. 필라테스. 가사도우미. 새 옷.
카페에서 노트북을 펴고 하는 일. 도매시장에서 사 온 물건들.
하나하나만 보면 별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전부 합치면 예전의 서윤과는 꽤 달랐다.
주말 저녁이었다.
아이를 재우고 나온 서윤이 식탁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는데 남편이 맞은편에 앉았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서윤이 먼저 물었다.
(서윤) : “왜?”
남편이 웃었다.
(남편) : “아니. 그냥 좀 궁금해서.”
(서윤) : “뭐가?”
(남편) : “아니, 미술학원도 다니고, 필라테스도 하고, 사람도 부르고. 옷도 좀 사고. 이제 이것저것 시작하는 것 같아서.”
서윤은 남편을 봤다. 목소리에 화는 없었다. 따지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서윤의 갑작스런 변화가 궁금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남편) : “장인어른이 계속 도와주시는 거야?”
서윤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여기서 또 거짓말을 하면 이상할 것 같았다.
아니, 이제는 자기가 싫을 것 같았다.
몇 달 동안은 필요했다. 혼자 생각할 시간.
이 돈이 생겼을 때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볼 시간.
그동안 서윤은 돈으로 물건보다 시간을 먼저 샀고, 그 시간으로 다시 무언가를 시작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윤은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서윤) : “여보.”
(남편) : “응.”
(서윤) : “나 사실 말 안 한 게 있어.”
남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남편) : “뭔데?”
서윤은 휴대전화를 가져왔다. 당첨금을 받은 계좌를 열었다. 남편 쪽으로 화면을 밀었다.
남편은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잔액을 보고, 서윤을 보고, 다시 화면을 봤다.
(남편) : “이게 뭐야?”
(서윤) : “로또.”
남편이 웃었다.
(남편) : “뭐?”
(서윤) : “나 로또 됐어.”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이 덧붙였다.
(서윤) : “1등.”
남편의 눈이 다시 휴대전화로 갔다.
(남편) : “언제?”
(서윤) : “몇 달 전에.”
남편이 고개를 들었다.
(남편) : “몇 달 전?”
이번에는 놀란 얼굴만은 아니었다. 당황한 기색이 섞였다.
(남편) : “근데 왜 지금 말해?”
서윤은 예상했던 질문이라 천천히 대답했다.
(서윤) : “처음엔 바로 말하려고 했어.”
남편 회사 앞까지 갔던 날이 떠올랐다.
(서윤) : “근데 나도 이 돈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남편) : “그래도 나한테는 말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서윤은 잠깐 멈췄다.
(서윤) : “맞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서윤) : “근데 말하는 순간 또 바로 생활비가 될 것 같았어.”
남편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서윤은 말을 이었다.
(서윤) : “대출 갚고, 부모님 드리고, 애한테 쓰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서윤) : “근데 그 전에 나도 한번 생각해보고 싶었어.”
남편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서윤) : “이 돈이 생겼을 때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서윤) : “그동안 내 돈이 있었던게 너무 오랜만이라...”
서윤은 잠깐 웃었다.
(서윤) : “그래서 그냥 좀 써봤어. 옷도 사고, 운동도 하고, 사람도 불러보고.”
(서윤) : “그러다가 알았어. 나는 돈으로 막 물건을 사고 싶은 게 아니더라.”
남편이 물었다.
(남편) : “그럼?”
(서윤) : “시간을 사고 싶었어.”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서윤은 며칠 동안 정리해둔 메모를 꺼냈다.
(서윤) : “나 생각해본 게 있어.”
먼저 대출. 남아 있는 집 대출을 갚는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께 같은 금액을 드린다.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 : “그건 나도 좋아.”
(서윤) : “그리고 남는 돈은 나누고 싶어.”
서윤은 종이에 적어둔 숫자를 가리켰다.
남편 30%. 서윤 30%. 노후와 장기투자 30%. 아이 10%.
남편이 종이를 내려다봤다.
(남편) : “나한테 30?”
(서윤) : “응.”
(서윤) : “당신도 당신 하고 싶은 데 써.”
남편은 잠깐 웃었다.
(남편) : “뭘 해도?”
(서윤) : “응. 나도 내 30%는 내가 쓸 거고.”
(남편) : “간섭하지 말자?”
(서윤) : “응.”
서윤은 나머지 숫자를 가리켰다.
(서윤) : “30%는 우리 노후랑 투자. 이건 같이 결정하고.”
(서윤) : “10%는 아이 앞으로.”
남편은 한참 종이를 봤다.
서윤은 괜히 긴장됐다. 몇 달 동안 혼자 고민한 계획이었다.
남편이 싫다고 하면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잠시 뒤, 남편이 종이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남편) : “그래.”
서윤이 눈을 깜빡였다.
(서윤) : “그래?”
(남편) : “응.”
남편은 다시 계좌 화면을 봤다. 그러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남편) : “근데 진짜 로또가 되긴 되는구나.”
서윤도 따라 웃었다.
몇 달 동안 혼자 품고 있던 32억이 처음으로 둘의 돈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서윤의 몫이 사라진 느낌은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기 몫을 정해놓고 나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