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8 / 10
준호와는 그 주말에 정리했다. 준호는 이유를 물었고, 민서는 솔직하게 말했다.
좋은 사람인 건 맞는데, 자기 마음이 그만큼 따라가지 않는 것 같다고. 준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알겠다고 했다.
그게 끝이었다.
월요일 아침. 민서는 출근해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옆자리 세린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민서는 컴퓨터를 켜다가 말했다.
(민서) : “나 헤어졌어.”
세린이 커피잔을 든 채 멈췄다.
(세린) : “네?”
민서는 괜히 모니터를 봤다.
(세린) : “갑자기요?”
(민서) : “응.”
(세린) : “왜요?”
(민서) : “그냥. 아닌 것 같아서.”
세린은 민서를 빤히 바라봤다. 굳이 세린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특히 월요일 아침부터.
그런데 말하고 싶었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알았으면 했다.
세린이라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점심시간. 예상대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세린과 민서가 옆 팀 사람들과 마주쳤다.
도윤도 있었다.
(세린) : “오늘 저희 대리님 제가 맛있는 거 사드려야 돼요.”
(민서) : “왜 네가 사.”
(세린) : “이별하셨잖아요.”
민서가 세린을 쳐다봤다.
(민서) : “야.”
(세린) : “근데 이별하고 더 좋아 보이시니 위로할 건 아닌가요?”
민서는 세린의 입을 막고 싶었다. 그런데 동시에, 도윤의 머리 위를 봤다.
21 잠시 뒤. 32
민서의 시선이 멈췄다. 도윤이 민서를 한번 봤다.
(도윤) : “괜찮으세요?”
(민서) : “네 그럼요. 실연 당한거 아니예요 ㅎㅎ”
왜 굳이 그 말까지 했지. 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41
민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확실했다. 알자마자 올랐다. 그 뒤로는 빨랐다.
도윤이 먼저 메신저를 보내는 일이 늘었다. 업무가 끝난 뒤에도 한두 마디가 더 붙었다. 퇴근 시간이 겹치면 자연스럽게 역까지 같이 걸었다.
어느 날은 도윤이 먼저 말했다.
(도윤) : “커피 드실래요?”
(민서) : “좋죠.”
48 탕비실에서 십 분쯤 얘기하고 돌아오는 길. 53
같이 점심을 먹고, 도윤이 민서의 농담에 웃던 날. 61
민서는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이제는 도윤도 자기에게 마음이 생기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민서는 옷장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연한색 블라우스를 꺼냈다. 귀걸이도 바꿨다.
출근하려고 이렇게 거울을 본 일이 있던가?
회사에서 도윤을 마주쳤다.
(도윤) : “좋은 아침입니다.”
(민서) : “좋은 아침이에요.”
숫자는 68 어제와 같았다.
민서는 잠깐 멈췄다. 그날 점심에도 68. 퇴근길에 같이 걸었는데도 68.
다음 날도. 68 민서는 조금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옷에 좀 더 신경써야 하나? 조금 덜 연락해야 하나?
며칠 뒤. 둘은 퇴근길에 편의점 커피를 하나씩 들고 걸었다. 집 이야기가 나왔다.
(도윤) : “저는 회사 가까운 게 최고예요.”
(민서) : “어디 사는데요?”
(도윤) : “선릉 쪽 오피스텔이요..”
민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와 비슷했다.
(민서) : “저도요.”
(도윤) : “서울에서 집 사는 건 다음 생에 해야죠.”
민서가 웃었다.
(민서) : “부모님 찬스는요?”
도윤도 웃었다.
(도윤) : “저희 부모님은 제가 찬스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대충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준호가 떠올랐다.
잠실 자가. 대치동 부모님. 안정적인 직장.
결혼하면 양가 도움까지 받아 자산을 키우고 싶다는 사람. 민서는 도윤을 슬쩍 봤다. 숫자는
72 였다. 마음은 올라갔다.
그런데 조건은 내려갔다. 이상하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며칠이 지나도 숫자는 70대였다.
다시 73. 민서는 점점 숫자를 자주 확인했다. 왜 안 오르지.
어제는 분명 분위기 좋았는데. 내가 연락을 너무 먼저 했나. 오늘은 먼저 보내지 말까.
일부러 답장을 조금 늦게 보내기도 했다. 도윤이 다가오면 한 번쯤 모른 척하기도 했다. 그런데 숫자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날은 69 까지 떨어졌다.
민서는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퇴근 무렵. 도윤에게 메신저가 왔다.
[도윤 : 오늘 잠깐 같이 걸을래요?]
둘은 회사 밖으로 나왔다. 평소처럼 걷는데, 도윤이 말이 없었다. 민서도 괜히 긴장됐다.
한참 뒤, 도윤이 멈춰 섰다.
(도윤) : “민서 대리님.”
(민서) : “네?”
도윤은 잠깐 망설였다.
(도윤) : “저 하나 물어봐도 돼요?”
(민서) : “뭔데요?”
(도윤) : “혹시.. 제 마음과 같은가 싶어서.. 저 좋아하세요?”
민서의 심장이 순간 크게 뛰었다. 도윤의 머리 위. 78
자기마음과 같은지 궁금하다며 좋아하냐고 물었다. 보통이라면, 이 정도 질문은 거의 고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민서에게는 숫자가 보였다. 100이 아니었다. 좋아하는게 아닌가? 민서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좋아한다고 말하면, 내가 먼저 마음을 다 보여주는 건가. 저 사람은 아직 78인데. 안좋아 하는 거면 어쩌지? 침묵이 길어졌다.
도윤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도윤) : “…아 불편한 질문이었으면 죄송해요.”
그리고 머리 위 숫자가 74 로 내려갔다.
민서는 그 숫자를 바라봤다. 상대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아는 게 많아질수록 더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