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건너는 해
의미 대신 주소

에피소드 47 / 50

질문지 첫 줄에는 세 번 다른 답을 썼다.

`고통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내 장애와 수감생활이 없었으면 찾지 못했을 의미처럼 보였다. 박진수와 오광철의 죽음까지 내 발견을 위한 사건이 됐다. 나는 지웠다.

`정호 형의 죽음은 남은 삶을 책임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앞서 쓴 보완지와 같은 문장이었다. 정호의 죽음을 다시 내 미래 계획의 근거로 만들었다. 그것도 지웠다.

`저는 구원받지 않았지만 오늘의 책임을 반복하겠습니다.`

이 문장은 정직한 답처럼 보였다. 동시에 심사위원이 기억하기 좋은 문장이었다. `구원받지 않았다`는 말을 통해 오히려 더 깊이 변화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었다.

세 번째 문장에도 줄을 그었다.

빈칸 아래에 짧게 썼다.

`수용생활에서 발견한 하나의 삶의 의미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책임과 반복할 행동을 아래 계획으로 제출합니다.`

그 문장도 멋있게 읽힐 수 있었다. 더 고치면 다른 명언이 될 것 같아 그대로 두었다.

출소 후 실천 계획 칸에는 주소부터 필요했다.

교정복지사 임혜원은 가족 주소를 쓰지 않은 내 계획표를 보았다.

“출소 직후 거주지는 어디로 신청하셨습니까?”

“장애인 자립전환 임시주거입니다.”

“승인 확정입니까?”

“사전 적합 판정만 받았습니다.”

혜원은 `거주 확정`에 표시하지 않고 `석방일 확정 뒤 최종 배정`이라고 고쳤다. 해당 주거는 출입구 경사로와 승강기, 침대 옆 이동 공간, 손잡이 있는 욕실을 갖춘 곳이었다. 최대 석 달을 머물 수 있지만 방이 없으면 다른 지역 대기시설로 가야 했다.

“대체 주거는요?”

“교정복지 연계 숙소 두 곳을 적었습니다.”

“두 번째 숙소는 욕실 문 폭이 한재호 씨 휠체어에 맞는지 현장 확인이 안 됐습니다.”

“전화로는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문턱과 회전 공간을 확인해야 합니다. 확정 계획으로 쓰지 마세요.”

나는 `가능`이라는 말을 `확인 대기`로 바꿨다.

수진의 집이나 수진 어머니 집은 계획표에 없었다. 유리와 연락이 회복되면 가족이 도울 수 있다는 문장도 쓰지 않았다.

“비상연락인은 변호사로 해도 됩니까?”

“의료 비상연락과 법률 연락은 다릅니다. 의료 의사결정 대리인을 지금 정하지 못하면 미지정으로 두고, 기관 사회복지 연락망을 적을 수 있습니다.”

나는 가족 이름이 비어 있는 칸을 계획 부족처럼 느꼈다. 그러나 이름을 쓰는 순간 그 사람에게 생길 의무를 묻지 않았다.

의료 계획은 더 길었다. 출소 후 일주일 안에 비뇨의학과에서 유치도뇨관과 감염 위험을 확인하고, 욕창 예방 외래와 재활의학과를 예약해야 했다. 교정의료에서 민간병원으로 기록이 넘어가는 데 동의서가 필요했다.

도뇨관·소변주머니·고정용품·피부보호제는 이 주 분량을 전환 물품으로 받고, 이후에는 처방과 급여 자격을 확인해야 했다. 수동휠체어 방석과 오른쪽 어깨 상태도 다시 평가하기로 했다.

활동지원 서비스는 출소일에 자동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신청 뒤 방문조사와 등급 결정이 필요했다. 임시주거 직원은 약 복용 확인과 비상 호출은 할 수 있지만 목욕·이전·도뇨관 관리 같은 개인 돌봄을 상시 제공하지 않았다.

“서비스 시작 전에는 어떻게 합니까?”

혜원이 물었다.

“혼자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합니다.”

“그 답으로는 부족합니다. 어깨 통증이 심해 이전을 못 하거나 욕실에서 도움이 필요하면요?”

나는 교도소 의료동처럼 벨을 누르면 누군가 오는 생활을 계획 속에서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혜원은 주거기관과 연계된 단기 방문지원 시간, 보건소 간호 방문 가능일, 응급이 아닌 생활지원 요청 창구를 확인했다. 목욕은 활동지원이 연결될 때까지 접근 가능한 샤워 의자와 주거 직원이 허용된 보조 범위를 사전에 합의해야 했다. 합의가 안 되면 외래 재활기관의 위생 지원 서비스를 예약하는 대안이 필요했다.

“확정됐습니까?”

“아직 기관 답변 대기입니다.”

나는 계획표에 다시 `확인 대기`를 썼다.

퇴소 당일 약은 칠 일분만 받을 수 있었다. 진통제·장 관리 약과 필요한 처방의 연속성을 위해 첫 외래 예약이 밀리면 교정병원 전환 처방 창구에 연락해야 했다. 발열, 관 막힘, 새 피부 발적, 갑작스러운 호흡곤란 때 각각 어느 기관으로 가는지도 적었다.

“응급실에 갈 때 휠체어를 두고 가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구급대에 수동휠체어 동행 가능 여부를 요청하고, 불가능하면 주거기관 보관과 회수 담당을 정합니다.”

그것도 담당자 이름은 아직 비어 있었다. 계획은 내가 혼자 모든 상황을 처리할 수 있다는 선언이 아니라, 빈칸이 어디인지 드러내는 표가 됐다.

“두 주 뒤 급여 승인이 안 나면요?”

혜원이 물었다.

“임시 의료지원 신청을 합니다.”

“신청 처리 동안 소모품을 어디서 받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혜원은 지역 보건소와 연계 의료기관의 긴급 공급 연락처를 적었다.

“이건 예약이 아니라 문제 생길 때 확인할 창구입니다. 사용 가능 여부는 출소 시점에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계획표에 `확인`이라는 말을 여러 번 썼다. 빈틈이 없는 계획보다 빈틈이 생기면 누구에게 연락할지를 적는 계획이 됐다.

장애등록과 급여 상태도 자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교정시설 안에서 받은 진단서와 기능평가를 행정기관이 검토해야 했다. 혜원은 신청 접수 예정일과 필요한 서류를 적되 수급 확정이라고 쓰지 않았다.

보호관찰소 출석은 접근 가능한 차량 예약과 연결돼 있었다. 장애인 이동지원 차량은 최소 사흘 전 예약이 필요했고, 갑작스러운 출석 통지는 보호관찰 담당자와 시간 조정을 요청해야 했다. 원격 출석은 담당자 승인 없이는 계획에 넣을 수 없었다.

“가족이 태워 줄 가능성은 없습니까?”

혜원이 절차상 물었다.

“계획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유를 요구하지 않고 대체 이동 수단을 적었다.

일자리 칸에는 쓸 것이 적었다. 사고 전 경력은 현장관리였고 현재 몸으로 같은 일을 할 수 없었다. 온라인 안전교육이나 문서 검토 일을 하겠다는 계획은 생각해 본 적이 있었지만, 자격과 채용 가능성을 확인하지 않았다.

`산업안전 교육 자원봉사`라고 쓰면 내 사고 경험을 유용한 자산으로 바꿀 수 있었다. 피해자 동의 없이 그들의 죽음을 강의 재료로 쓸 위험도 있었다.

나는 `출소 후 3개월 이내 직업능력 평가 및 원격 사무훈련 상담`이라고만 썼다. 소득은 장애급여·긴급생활지원 자격 검토와 영치금 잔액, 법률 비용을 함께 계산해야 했다.

임시주거비와 식비, 소모품 본인부담, 장애인 이동지원 차량 비용을 최소·최대 범위로 나눴다. 확정된 영치금만으로는 첫 달 예상비용을 모두 충당하기 어려웠다. 긴급생활지원이 승인되지 않으면 법률 비용 분납과 지역 복지기금 상담이 필요했다.

`가족 지원 가능` 칸은 비워 두었다. 그 빈칸을 숨기기 위해 자원봉사자와 교회 도움을 확정된 것처럼 적지 않았다. 최 목사는 정호의 연락 대상이었지 내 출소 후 보호자가 아니었다.

서준호는 회사의 추가 대응에 대비한 연락 창구로 자기 사무실을 적되 무료 대리를 보장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회사 구상 청구가 오면 어떻게 합니까?”

“소장을 받은 뒤 대응합니다. 지금 승소나 비용을 계획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실명 공개를 후회하느냐고 심사에서 물을 겁니다.”

“법률 답변을 준비해 드릴 수는 있지만 후회 여부는 한재호 씨가 답해야 합니다.”

심사 예상 질문은 서기현과 함께 확인했다.

“왜 실명 공개를 선택했습니까?”

“공개 기록에서 제 승인 사실이 관련 관리자라는 말 안에 다시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했습니다. 회사 압박과 보고체계 책임도 함께 남겼습니다.”

“그 선택이 피해를 회복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요. 기록 범위를 바꾼 일입니다.”

“사과문은 왜 피해자에게 보내지 않았고 심사에도 내지 않았습니까?”

“피해자가 요청하지 않았고 수령 의사를 다시 묻는 것도 답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심사에 내면 사과를 제 평가자료로 쓰게 됩니다.”

“그 답을 말하는 것 자체가 자기평가 아닙니까?”

나는 멈췄다.

“제가 한 선택의 이유를 묻는 범위에서 답했습니다. 그 이유가 저를 좋은 사람으로 증명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정호 씨 사별 보완지는 왜 비었습니까?”

“정호 씨의 삶과 죽음을 제 변화 증거로 제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정호 씨에게 배운 것이 없습니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가석방 자료로 제출할 권리가 있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와 가족이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데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그들의 반응으로 제 변화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공개 기록 선택, 연락하지 않은 선택, 의료동에서 기록된 행동과 앞으로 검증할 계획뿐입니다.”

“가족 지원 없이 계획이 유지될 수 있습니까?”

“유지된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거·의료·이동·생활지원의 기관별 담당과 대체 창구를 적었습니다. 연결이 실패하면 보호관찰 담당자와 복지사에게 즉시 알리는 계획입니다.”

“수진 씨나 유리 씨가 나중에 연락하면 계획이 바뀝니까?”

“그들이 원할 때 관계의 범위를 따로 정할 수는 있습니다. 주거와 돌봄 계획의 전제에는 넣지 않습니다.”

“피해자에게 사과할 기회가 생기면요?”

“상대가 요청한 범위와 전달 절차를 확인하겠습니다. 제 출소나 심사 결과를 알리기 위한 연락은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답을 외우려다 멈췄다. 심사에서는 같은 질문이 다른 말로 나올 수 있었다. 문장을 정확히 재생하는 것보다 확인하지 않은 약속을 하지 않는 일이 필요했다.

서기현은 내 답을 칭찬하지 않았다. 모호한 부분에는 다시 질문 표시를 했다.

심사 당일 나는 질문지와 출소 계획표를 제출했다. 의미 칸은 두 문장뿐이었고, 계획표에는 `확정`, `조건부`, `확인 대기`가 섞여 있었다.

교육동 경사로 앞에서 나도윤에게 휠체어를 밀어 달라고 요청했다. 오른쪽 어깨는 긴 준비 기간 동안 다시 피로해져 있었다. 도윤은 발판과 손 위치를 확인한 뒤 경사로를 올랐다.

문 앞 대기선에서 그는 손을 놓았다.

“여기서부터 직접 들어가시면 됩니다.”

나는 바퀴를 한 번 밀었다.

심사실 안에서 내 이름이 불렸다.

“수용번호 4271, 한재호 씨 들어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