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4 / 10
지연은 결국 회사에 휴직계를 냈다.
처음부터 오래 쉴 생각은 아니었다. 성호가 언제 원래대로 돌아올지도 몰랐고, 아이돌 일이 정말 얼마나 이어질지도 알 수 없었다.
기획사는 작은 회사였다. 대표는 성호가 지연을 유난히 편해한다는 이유로, 당분간 지연에게 전담 매니저 일을 맡겨보기로 했다.
일정 관리. 이동. 의상과 준비물 확인. 현장에서 필요한 것 챙기기.
지연은 첫날 받은 일정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지연) : “내가 진짜 이걸 왜 하고 있지.”
옆에서 성호가 모자를 눌러쓰며 말했다.
(성호) : “나 때문에.”
(지연) : “그걸 몰라서 묻는 줄 알아?”
성호가 웃었다.
기획사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둘을 반겼다.
(직원) : “성호 씨, 오늘 프로필 촬영 있는 거 아시죠?”
(성호) : “네.”
(직원) : “지연 매니저님도 잘 부탁드려요.”
지연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매니저님’이라는 말이 이상했다.
더 이상한 건 그다음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성호가 지연을 불렀다.
(성호) : “지연 누나.”
지연의 발이 멈췄다.
성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성호) : “제 물 어디 있어요?”
지연은 웃는 얼굴로 물병을 건넸다.
(지연) : “여기.”
그리고 이를 악물고 아주 작게 말했다.
(지연) : “누나라고 하지 마.”
성호도 웃는 얼굴 그대로 속삭였다.
(성호) : “그럼 뭐라고 해.”
(지연) : “그냥 매니저님이라고 해.”
(성호) : “여보는?”
지연이 성호 발을 밟았다.
(성호) : “악.”
직원이 돌아봤다.
(직원) : “왜요?”
성호는 바로 표정을 바꿨다.
(성호) : “아니에요. 신발끈이 좀 밟혀서요.”
지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순발력 하나는 정말 아이돌 체질이었다.
프로필 촬영이 시작됐다.
지연은 한쪽에서 팔짱을 낀 채 지켜봤다.
처음에는 성호가 어색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사진작가가 턱을 조금 들라고 하면 들었고, 눈을 내리깔라고 하면 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진작가) : “이번엔 조금 더 차갑게.”
성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사진작가) : “좋아요. 이번에는 웃어볼게요.”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스태프가 작게 감탄했다.
(스태프) : “진짜 잘한다.”
지연은 어이가 없었다.
집에서 사진을 찍자고 하면 늘 똑같은 브이만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성호가 카메라 앞에서는 턱 각도까지 바꿔가며 표정을 쓰고 있었다.
촬영이 끝나자 직원이 말했다.
(직원) : “성호 씨, 이런 거 해본 적 진짜 없죠?”
(성호) : “네. 처음이에요.”
(직원) : “감이 좋은데요?”
성호가 수줍게 웃었다.
(성호) : “감사합니다.”
지연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차에 타자마자 물었다.
(지연) : “당신 원래 저렇게 웃을 줄 알았어?”
(성호) : “어떻게?”
(지연) : “방금 그 표정.”
(성호) : “무슨 표정.”
(지연) : “나는 처음 봤는데.”
성호가 선바이저 거울을 내렸다.
그리고 아까처럼 살짝 웃어 보였다.
(성호) : “이거?”
지연이 바로 거울을 올려버렸다.
(지연) : “하지 마.”
(성호) : “왜. 잘한다며.”
(지연) : “재수 없으니까.”
성호는 한참 웃었다.
그날 오후에는 안무 연습이 있었다.
성호는 스무 살의 몸답게 체력은 좋았다. 몇 시간을 움직여도 크게 지치지 않았다.
문제는 정신이었다.
안무가가 다음 주부터 연습량을 더 늘리겠다고 하자 성호가 진지하게 물었다.
(성호) : “이걸 매일 해요?”
(안무가) : “네. 데뷔 전에는 더 할 수도 있어요.”
성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성호) : “아, 스무 살 때 이렇게 몸 쓰면 나 마흔에 디스크 오는 거 아니야?”
순간 연습실이 조용해졌다.
지연은 눈을 감았다.
안무가가 웃었다.
(안무가) : “벌써 마흔 걱정을 해요?”
성호가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성호) : “미리 관리해야죠.”
다들 웃었다.
지연만 알고 있었다.
저 사람은 미리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마흔이었다.
연습이 끝난 뒤 성호는 대기실 소파에 앉자마자 휴대전화를 켰다.
지연이 화면을 봤다.
이번에는 주식이 아니었다.
연금 계좌였다.
(지연) : “당신 진짜 대단하다.”
(성호) : “왜.”
(지연) : “스무 살 몸으로 연금 확인하는 사람 처음 봐.”
(성호) : “복리에는 시간이 중요해.”
(지연) : “당신 시간 지금 거꾸로 갔잖아.”
성호가 잠깐 멈췄다.
(성호) : “그럼 더 좋은 거 아냐?”
지연은 할 말을 잃었다.
며칠 뒤.
첫 무대 의상 피팅이 있는 날이었다.
지연은 스타일리스트와 일정 이야기를 하다가 피팅룸 앞에서 기다렸다.
잠시 뒤 커튼이 열렸다.
성호가 나왔다.
평소 입던 청바지와 티셔츠가 아니었다.
검은 바지에 몸에 맞는 셔츠. 머리는 이마가 조금 보이게 정리되어 있었고, 메이크업까지 끝난 얼굴은 평소보다 선이 더 또렷했다.
성호가 거울 앞에 서서 옷깃을 정리했다.
스타일리스트가 만족한 듯 말했다.
(스타일리스트) : “와, 잘 받는다.”
지연도 무심코 성호를 봤다.
그리고 잠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스무 살.
정말 스무 살짜리 남자 같았다.
아니.
처음 보는 남자 같았다.
성호가 거울 너머로 지연과 눈이 마주쳤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성호) : “왜 봐?”
지연이 바로 시선을 돌렸다.
(지연) : “안 봤어.”
성호가 웃었다.
(성호) : “봤는데.”
지연은 괜히 일정표를 펼쳤다.
이상했다.
분명 자기 남편인데.
오늘은 조금 낯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