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건너는 해
사고 전날

에피소드 9 / 50

사고 전날 아침 나는 달걀을 태웠다.

그날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경고도 균열도 아니었다. 프라이팬 가장자리에 붙어 검게 변한 달걀흰자였다.

수진은 유리의 머리를 묶고 있었고, 나는 아침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전날 밤 늦게 들어와 미안했기 때문이었는지, 주말에도 현장에 나가야 한다는 말을 하기 전 분위기를 좋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뒤집어야지.”

수진이 말했다.

“반숙으로 할 거야.”

“반숙하고 태우는 건 달라.”

“노른자는 안 탔잖아.”

유리가 식탁에 앉아 웃었다.

“아빠 요리 못해.”

“달걀은 요리라고 하기 어렵지.”

“그러니까 그것도 못하는 거잖아.”

나는 뒤집개로 달걀을 접시에 옮겼다. 흰자의 검은 부분을 떼어내자 모양이 반달처럼 되었다.

“달이네.”

유리가 말했다.

“아침부터 달 먹으면 시험 잘 본다.”

“오늘 시험 없어.”

“그럼 다음 시험까지 효과가 가겠네.”

유리는 노른자를 젓가락으로 찔렀다. 노란 액체가 밥 위로 흘렀다.

수진은 냉장고 문에 붙어 있던 일정표를 떼어 내 앞에 놓았다.

“내일 유리 치과 세 시.”

“알아.”

“당신이 데려가기로 했어.”

나는 일정표를 보았다. 토요일 칸에 파란 펜으로 ‘유리 치과 3시’라고 적혀 있었다. 내 글씨였다.

“내일 현장 점검이 있어.”

“몇 시에 끝나는데?”

“오전이면 끝날 거야.”

“오전이면 정확히 몇 시?”

“늦어도 한 시.”

수진은 나를 보았다.

“지난번에도 한 시라고 했어.”

“이번에는 점검만 하면 돼.”

“점검 끝나고 회의하고, 회의 끝나고 본부장 전화 오고, 그러면 또 못 오는 거 아니야?”

“내일은 올게.”

나는 너무 쉽게 말했다.

당시에는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내일 발생할 일들 중 내가 통제하지 못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계산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유리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빠, 그거 사와.”

“뭐?”

“내가 사진 보낸 거.”

나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유리가 전날 보낸 링크가 있었다. 우주선 모양의 조립블록이었다. 작은 우주인 두 명과 달 탐사차가 들어 있는 제품이었다.

“이걸 왜 사?”

“과학 발표할 때 쓸 거야.”

“발표하는 데 장난감이 왜 필요해?”

“있으면 더 잘 보이잖아.”

“엄마한테 허락받았어?”

유리는 수진을 봤다.

수진이 말했다.

“나한테는 준비물이라고 했어.”

“준비물 맞아.”

유리가 말했다.

“발표 끝나고는?”

“내가 보관해줘야지.”

나는 웃었다.

“오늘 사올게.”

“진짜?”

“응.”

“몇 시에 와?”

“저녁 먹기 전.”

수진이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봤다.

나는 시간을 고쳤다.

“늦으면 잠들기 전에는 갈게.”

유리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약속.”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손가락을 걸었다.

아홉 살 아이의 손가락은 가늘었다. 나는 힘을 주지 않아도 쉽게 구부릴 수 있었다.

사고 뒤 병원에서 유리는 내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자기 손가락을 걸었다. 나는 진통제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진이 이제 가야 한다고 했을 때도 손가락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 장면을 사고 전날 아침의 약속과 자주 연결했다.

그러나 두 장면 사이에 실제로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사람은 비슷한 모양을 발견하면 앞뒤에 이야기를 만든다.

나는 집을 나서며 우주선 조립블록의 제품명을 메모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회사 메일을 확인했다. 새벽 한 시 십이 분에 현장소장 조병철이 공정현황을 보냈다.

철골 보강률 82퍼센트.

전기배선 64퍼센트.

자동화설비 반입 지연 1일.

야간 집중작업을 실시하면 준공 기준일 유지 가능.

마지막 문장은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확인’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회사까지 가는 차 안에서 장석호 본부장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아홉 시 회의 앞당겼어. 여덟 시 반까지 와.”

“지금 이동 중입니다.”

“발주처에서 또 전화 왔어. 월요일까지 답 달래.”

“현장점검 후 확정하겠습니다.”

“또 점검이야?”

“연결부 변위가 기준치에 근접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초과했어?”

“아닙니다.”

“그럼 현장에서 판단해. 본사까지 올릴 건 아니잖아.”

“안전담당 확인이 필요합니다.”

“확인해. 대신 일정은 지켜야 해.”

장석호는 전화를 끊기 전에 말했다.

“재호야, 이번 것만 끝내면 네 자리 달라져.”

그는 승진을 직접 약속하지 않았다. 자리라는 말이면 충분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대기업 계열사에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사람은 다음 프로젝트를 맡았다. 다음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 직급이 올라갔다. 경력은 계단처럼 보였다. 한 칸을 오르면 아래 칸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무실 회의실에는 이미 재무팀, 영업팀, 시설팀 담당자들이 모여 있었다. 화면에는 공사 지연에 따른 손실 추정치가 떠 있었다.

하루 지연 시 직접비용 1억 8천만 원.

발주처 청구 가능 손실 별도.

장석호는 숫자를 가리켰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안전 중요하다는 거 알아. 나도 알아. 그런데 안전하다는 말로 일정 다 놓치면 사업을 어떻게 해?”

아무도 안전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다.

문제는 안전이 얼마나 중요한지였다. 일정과 비용과 계약보다 항상 중요한지, 위험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중요한지, 누가 그 판단으로 생기는 손실을 책임질지.

시설팀장이 말했다.

“현재 구조검토 값은 허용범위 안입니다. 보강재 일부가 도면과 다르다는 현장보고가 있어 재확인 중입니다.”

“도면과 다르면 바꾸면 되잖아.”

장석호가 말했다.

“보강 완료까지 하루 이상 걸릴 수 있습니다.”

“그 하루가 여기 얼마라고 써 있어?”

시설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회의자료를 넘겼다.

“오늘 현장에서 실측하고, 문제가 있는 구간을 제외한 작업은 진행하겠습니다.”

“전체 작업 중지할 이유는 없다는 거지?”

장석호가 물었다.

“현재 자료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 순간 회의의 방향이 정해졌다.

‘현재 자료상으로는’이라는 조건은 회의록에서 빠질 수 있었고, ‘전체 작업 중지할 이유 없음’만 남을 수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시설팀 안전담당 김도현이 나를 따라 나왔다.

“현장 보강상태 확인 전까지 야간 하중은 안 거는 게 좋습니다.”

“보고서에는 안전율 1.12라고 되어 있잖아요.”

“입력값이 맞다는 전제입니다.”

“틀렸다는 근거가 있습니까?”

“보강재 사진이 도면하고 다릅니다.”

“현장에서는 각도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확인하자는 겁니다.”

“오늘 확인할 수 있습니까?”

“점검업체가 내일 오전에 갑니다.”

“오늘 작업을 전부 세우면 하루 늦습니다.”

“야간 집중하중만 미루세요. 다른 작업은 구간 분리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동화설비 반입이 밀립니다.”

김도현이 나를 보았다.

“한 부장님, 저는 안전 의견 드리는 겁니다. 일정 결정은 현장에서 하세요.”

그도 결정을 내게 넘겼다.

장석호는 일정은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도현은 야간작업을 미루는 게 좋다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최종 결정은 현장에서 하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권한이라고 받아들였다.

오전 열한 시에 현장으로 출발했다. 차 안에서 점심으로 삼각김밥과 캔커피를 먹었다. 수진에게 저녁이 늦을 수 있다고 메시지를 쓰다가 지웠다. 아직 늦는다고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박진수가 출입구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담배를 등 뒤로 숨겼다. 지정장소 밖이었다.

“여기서 피우시면 안 됩니다.”

내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바로 끄겠습니다.”

그는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넣었다.

“보강구간 작업하십니까?”

“네. 오후에 3구간 들어갑니다.”

“사진하고 도면이 다르다던데요.”

“사진 각도 때문입니다. 실제로 보면 큰 차이 없습니다.”

“큰 차이가 없다는 건 차이는 있다는 뜻입니까?”

박진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브래킷 하나 위치가 조금 다릅니다. 현장소장님한테 말씀드렸습니다.”

“안전에는 영향 없습니까?”

“제가 계산하는 사람은 아니라서요.”

그의 대답이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정확한 대답이었다. 그는 계산을 맡은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가 아는 범위를 말했다.

“이상한 소리나 진동 있으면 바로 보고해주세요.”

내가 말했다.

“어제부터 3번 기둥 쪽에서 울리는 소리가 납니다.”

“울리는 소리요?”

“하중 들어갈 때 평소보다 길게 갑니다.”

“현장소장한테 보고했습니까?”

“예. 조 소장님은 철판 마찰음 같다고 했습니다.”

“녹음한 거 있습니까?”

“그 소리가 계속 나는 건 아니라서요.”

나는 조병철을 호출했다.

조병철은 안전모를 벗어 땀을 닦으며 왔다.

“3번 기둥 소리 확인했습니까?”

“네. 연결플레이트가 자리 잡으면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확실합니까?”

“시공팀 의견은 그렇습니다.”

“문제 없다는 말입니까?”

“현재까지 변형은 없습니다.”

나는 박진수를 봤다.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오후 실측 때 다시 보죠.”

내가 말했다.

그 말로 현장의 문제는 오후까지 미뤄졌다.

오광철은 자재 적치구역에서 케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이름보다 얼굴로 먼저 알아봤다. 안전교육 때 질문을 한 사람이었다.

“한 부장님.”

그가 인사했다.

“전기기능사 시험 준비한다면서요.”

내가 물었다.

“누가 말씀했습니까?”

“안전교육 때 문제집 보고 있었잖아요.”

“아, 그거요.”

그는 웃었다.

“이번에는 붙어야죠.”

“공부할 시간 있습니까?”

“점심하고 이동할 때 합니다.”

“현장에서는 문제집 보지 마세요.”

“작업시간에는 안 봅니다.”

그는 케이블 타이를 잘라내며 말했다.

“내일 야간작업 확정입니까?”

“점검 결과 봐야 합니다.”

“야간 들어가면 일요일 시험장 바로 가야 해서요.”

“교대 요청했습니까?”

“사람이 없답니다.”

“현장소장하고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나는 노트에 오광철의 이름을 적었다.

오광철—시험, 야간교대 확인.

그 메모는 사고 뒤 내 수첩에서 발견됐다. 수사관은 내가 작업자 개인사정까지 관리할 만큼 현장에 깊이 관여했다는 증거로 보았다. 변호인은 내가 작업자 처우를 챙겼다는 자료라고 말했다.

같은 메모가 두 가지 의미를 가졌다.

나는 그날 오광철의 교대를 바꿔주지 못했다.

점심은 현장식당에서 먹었다. 스테인리스 식판에 제육볶음과 콩나물국이 나왔다. 나는 현장소장들과 따로 마련된 작은 테이블에 앉으려다 작업자들이 있는 쪽으로 갔다. 직원들과 같은 밥을 먹는 관리자로 보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박진수와 최민석이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오광철은 문제집을 식판 옆에 접어두고 밥을 먹었다. 내가 다가가자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냥 앉으세요.”

나는 빈 의자에 앉았다.

“음식 괜찮습니까?”

관리자가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질문이었다.

“늘 똑같죠.”

민석이 말했다.

“똑같으면 품질은 일정한 겁니다.”

내가 농담하자 박진수가 웃었다. 오광철은 국을 마시다 문제집을 식판에서 더 멀리 옮겼다.

“시험이 이번 주라고 했죠?”

내가 물었다.

“일요일입니다.”

“야간교대는 조 소장한테 다시 말해보겠습니다.”

“안 되면 끝나고 바로 가면 됩니다.”

“밤새우고 시험 보면 떨어집니다.”

“이번에 떨어지면 다음에 보면 되고요.”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문제집 모서리는 여러 번 접혀 있었고, 답안 부분에는 형광펜이 빽빽했다.

박진수의 작업가방 옆에는 비닐봉지가 있었다. 안에 어린이용 축구장갑이 보였다.

“그건 뭡니까?”

내가 물었다.

“둘째 놈 겁니다.”

“골키퍼입니까?”

“골키퍼 하고 싶다고 해서 사긴 샀는데, 공 맞는 건 무섭답니다.”

박진수가 장갑을 꺼내 손바닥을 보여줬다. 검은색 고무에 형광색 무늬가 있었다.

“토요일에 경기 있는데 야간 들어가면 못 갑니다.”

“내일 야간하고 토요일 경기입니까?”

“네. 아침에 끝나면 씻고 바로 가면 후반은 볼 수 있습니다.”

“교대 요청하시죠.”

“광철이도 시험 있다는데 다 빠지면 누가 합니까.”

민석이 말했다.

“나는 갈 데 없으니까 둘 다 보내고 혼자 하지 뭐.”

“혼자 할 수 있는 작업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농담입니다, 부장님.”

그들은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작업 인원과 교대는 현장소장이 관리해야 했지만, 이야기를 들은 이상 내가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일 점검 끝나고 인원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박진수는 장갑을 비닐봉지에 넣었다.

“부장님, 3번 기둥은 진짜 한 번 보셔야 합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후에 실측합니다.”

“수치 말고 소리요. 쇳소리라기보다 안쪽이 당겨지는 소리입니다.”

“조 소장은 마찰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박진수는 더 강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안전담당자가 아니었고, 내가 물으면 자신이 느낀 것을 설명할 뿐이었다.

“소리 나면 바로 녹음하세요.”

내가 말했다.

“휴대전화 작업구역에 못 들고 들어갑니다.”

“반장 무전기로 보고하시고요.”

“네.”

나는 식사를 마치고 먼저 일어났다. 식판 반납구로 가는 동안 세 사람의 대화가 다시 시작됐다. 민석이 축구장갑을 끼고 박진수에게 공을 던지는 흉내를 냈고, 오광철이 문제집으로 공을 막는 시늉을 했다.

그 장면은 수사기록에 없었다.

누구도 점심때 무엇을 먹었고 어떤 농담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사고의 원인을 밝히는 데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유류품 목록에서 축구장갑과 문제집을 봤을 때, 나는 점심식당의 창가와 콩나물국 냄새를 함께 떠올렸다.

사람은 기록에 남은 물건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살았지만, 죽은 뒤에는 필요한 부분만 증거가 되었다.

오후 실측에서는 기준치를 넘는 값이 나오지 않았다. 가장 높은 변위가 허용치의 92퍼센트였다. 김도현에게 전화하자 그는 숫자 하나만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

“증가 추세를 봐야 합니다.”

“전날보다 2밀리미터 늘었습니다.”

“하중 조건이 같습니까?”

“정확히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비교가 어렵습니다.”

“사용중지 기준에는 해당하지 않죠?”

“수치상으로는 아닙니다. 그래도 내일 점검 전에는 집중하중 미루는 게 좋습니다.”

나는 회의록에 적었다.

변위 측정 결과 허용기준 내. 점검업체 익일 오전 확인 예정.

‘집중하중 미루는 게 좋다’는 말은 별도 참고사항으로 넣으려다 지웠다. 현장소장 조병철과 시공사 책임자가 모두 작업 가능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다수 의견을 반영했다고 생각했다.

오후 다섯 시 회의에서 나는 말했다.

“오늘은 보강작업만 진행하고, 내일 점검 후 오후부터 야간 집중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조병철이 물었다.

“내일 점검이 늦어지면요?”

“오전 중 오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업체가 자주 늦습니다.”

“도착 전까지 준비작업만 하세요.”

“인원은 그대로 대기시킵니까?”

“네.”

“대기비용이 발생합니다.”

“일정 유지하려면 필요합니다.”

나는 안전을 위해 작업을 하루 미룬다고 생각했다.

김도현은 야간 집중하중을 미루라고 했고, 나는 그날 밤 작업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권고를 따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점검 전까지 사람과 장비를 모두 준비시켜놓았다. 점검이 지연되면 작업을 시작하고 싶은 조건을 스스로 만들었다.

저녁 일곱 시가 넘어 현장을 나왔다. 유리에게 장난감을 사기로 한 약속이 떠올랐다. 고속도로 진입 전 대형마트에 들렀다.

완구코너에서 우주선 조립블록을 찾는 데 십오 분이 걸렸다. 비슷한 제품이 세 종류였다. 나는 유리가 보낸 사진을 확대해 제품번호를 대조했다. 가장 큰 상자를 골라 카트에 넣었다.

가격은 생각보다 비쌌다.

잠시 다른 제품으로 바꿀까 생각했다가 그대로 계산했다. 약속을 지킨다는 사실을 돈으로 확실하게 만들고 싶었다.

계산대 직원이 선물 포장을 할 것인지 물었다.

“괜찮습니다.”

차 트렁크에 상자를 넣으며 유리에게 사진을 보내려다가 멈췄다. 집에 가져가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수진에게는 ‘지금 출발’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곧 답이 왔다.

유리 기다리다 잠들었어. 깨우지 말고 와.

나는 시간을 봤다. 밤 아홉 시 이십칠 분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도, 잠들기 전에도 가지 못했다.

집에 도착한 것은 열 시 반이었다. 수진은 거실 소파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장난감은?”

그녀가 물었다.

“차에 있어. 내일 아침에 줄게.”

“내일 일찍 간다며.”

“일곱 시 전에 주고 가면 돼.”

“유리 여섯 시 반에는 안 일어나.”

“그러면 다녀와서 주지.”

수진은 노트북을 덮었다.

“치과는?”

“한 시까지 올게.”

“오늘도 저녁 전에 온다고 했어.”

“내일 점검만 끝나면 된다니까.”

“당신은 항상 끝나면 된대.”

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공사가 실제로 끝나가고 있어.”

“공사 말고 약속.”

“약속도 지킬 거야.”

수진은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유리 방 문을 조금 열었다. 책상 위 스탠드가 켜져 있었고 유리는 침대에서 벽 쪽을 보고 자고 있었다. 바닥에는 과학책과 색연필이 흩어져 있었다.

침대 옆에 장난감을 놓으려면 차에 다시 내려가야 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문을 닫았다.

내일 아침.

그 말이면 충분했다.

샤워를 마친 뒤 노트북을 켰다. 현장소장이 보낸 다음 날 작업계획표를 확인했다.

08:00 작업인원 집결.

09:00 안전점검업체 현장확인.

11:00 점검결과 공유.

13:00 보강 최종완료.

16:00 야간 집중작업 개시.

나는 오후 네 시 항목을 노란색으로 표시했다.

조건부 승인이라고 메모했다.

점검결과 이상 없을 시.

메일을 보내려는데 장석호에게 전화가 왔다.

“내일 네 시에는 시작하는 거지?”

“점검 결과 봐야 합니다.”

“문제 없으면.”

“네.”

“문제라는 게 뭔지는 현장에서 정해. 안전팀은 책임 안 지려고 무조건 미루라고 해.”

“알겠습니다.”

“최종 결정은 현장에서 해.”

전화가 끊겼다.

나는 메일 문장을 고쳤다.

점검결과 이상 없을 시 16시 작업 개시.

‘이상 없을 시’를 ‘중대한 이상 없을 시’로 바꿀까 생각했다. 작은 이상이 있어도 보강 후 진행할 수 있도록 여지를 두기 위해서였다.

결국 원래 문장을 보냈다.

그날 밤 안전담당 김도현이 열한 시 사십팔 분에 메일을 보냈다.

제목은 ‘3구간 연결부 추가확인 필요’였다.

나는 자정이 조금 넘어 메일을 열었다.

사진 세 장과 측정표가 첨부되어 있었다. 본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현재 측정값은 허용기준 이내이나 보강재 설치상태와 하중조건이 설계 검토값과 일치하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확인 완료 전 집중하중 작업은 보류를 권고합니다.

나는 메일을 끝까지 읽었다.

‘확인 완료 전 집중하중 작업은 보류를 권고합니다’라는 문장을 봤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이미 다음 날 오전 점검이 예정되어 있었다. 점검 전에는 집중작업을 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내 일정과 김도현의 권고는 충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답장은 쓰지 않았다.

침대에 누웠을 때 수진은 이미 자고 있었다. 나는 알람을 여섯 시로 맞췄다.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연결하고 천장을 봤다.

내일 점검이 끝나면 현장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한 시 전에 집으로 돌아와 유리를 치과에 데려가고, 차에 있는 우주선 조립블록을 줄 수 있었다.

저녁에는 함께 조립할 수도 있었다.

다음 주에는 준공보고서를 마무리하고, 그 다음 주에는 발주처 승인회의가 있었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며칠 휴가를 낼 생각이었다.

그날 나는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다.

미래가 반드시 온다고 믿어서가 아니었다.

오지 않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불을 끄고 잠들었다.

트렁크 안에는 우주선 조립블록이 있었다.

노트북에는 다음 날 작업계획표가 열려 있었다.

휴대전화에는 김도현의 메일이 읽음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