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건너는 해
빈 침대의 기록

에피소드 45 / 50

정호가 완화병상으로 옮긴 뒤 열이틀 동안 세 번 전화했다.

첫 통화에서 그는 물컵 자리가 맞다고 했다.

“오른손 앞에 있어. 호출벨도 왼쪽에 붙여 놨고.”

“숨은 어떻습니까?”

“말 길게 하면 차.”

“그럼 끊을까요?”

“내가 끊을 때 말할게.”

그는 병실 창문이 너무 밝아 낮에는 커튼을 절반 친다고 했다. 옆 침대 환자가 밤에 이를 가는 소리가 난다는 말도 했다. 나는 암과 죽음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성경은 가져갔습니까?”

“안 가져왔어. 공용 선반에 두기로 했잖아.”

“읽고 싶으면요?”

“병원에 하나 있대. 지금은 글이 눈에 안 들어와.”

통화는 사 분 만에 끝났다. 정호가 먼저 끊었다.

두 번째 통화는 나흘 뒤였다. 목소리가 전보다 작았고 문장 사이 숨이 길었다. 흉수는 유치관으로 두 번 배액했고, 산소는 계속 쓰고 있다고 했다.

“최 목사는 왔습니까?”

“어제 왔어.”

“무슨 얘기 했습니까?”

“그건 안 말할 거야.”

“알겠습니다.”

“너는 뭐 해.”

“그대로 있습니다.”

“그게 뭔데.”

나는 배성환의 산소장치 점검으로 공용공간 자리가 바뀌었고, 정호의 옛 침대가 비어 있어 밤에 방이 넓어 보인다고 말했다.

“내 침대 아직 비워 놨어?”

“새 수용자 배정 전입니다.”

“침대는 내 것 아니었어.”

정호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소유와 죽음의 가르침으로 만들지 않았다. 교도소 침대는 원래 개인 소유가 아니었다.

세 번째 통화는 이틀 뒤 의료진이 시간을 정해 연결했다. 정호는 대부분 짧게 대답했다.

“오늘은 물 마셨습니까?”

“조금.”

“아픕니까?”

“약 들으면 괜찮아.”

“할 말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정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로 산소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없어.”

그가 말했다.

“너는?”

나는 준비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고마웠다, 미안했다, 형에게 배웠다. 모두 마지막 통화에 맞춰 정리한 문장처럼 보였다.

“오늘은 없습니다.”

“그럼 끊자.”

그것이 마지막 통화였다.

완화병상 의료진의 인계는 정호가 허용한 범위에서만 왔다. 섭취량 감소, 잠드는 시간 증가, 호흡곤란 때 추가 약물 사용, 흉수 배액 뒤에도 회복 시간이 짧아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정확한 검사 수치와 모든 처치 기록은 내게 전달되지 않았다.

여덟째 날 정호는 최 목사와 영상 통화를 하지 않고 음성 통화만 택했다. 화면에 얼굴을 보여 주는 데 힘을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최 목사는 병실 방문을 제안했고 정호는 다음 날 오후 삼십 분만 허용했다.

의료진은 먹는 양이 줄어 수액과 영양 보조 방법을 설명했다. 정호는 입으로 마실 수 있는 동안 원하는 음료를 조금씩 마시고, 탈수로 불편이 커질 때 제한적인 수액은 받겠다고 했다. 코나 위로 관을 넣는 영양 공급은 원하지 않았다.

“수액을 많이 맞으면 힘이 납니까?”

정호가 물었다.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몸이 처리하지 못하면 부종이나 호흡곤란이 심해질 수 있습니다. 갈증은 입안 관리와 소량 음료가 더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럼 목마를 때 입 적시고, 내가 마시고 싶으면 마실게요.”

의료진은 그 선택을 `영양 치료 거부` 한 줄로 줄이지 않고 목표와 범위를 기록했다.

호흡곤란 완화 약물이 늘면 더 졸릴 수 있다는 설명도 들었다. 정호는 숨찬 것을 줄이는 쪽을 우선하되, 최 목사 방문 전에는 대화할 수 있는 정도를 원한다고 했다. 방문이 끝난 뒤에는 필요하면 약을 조정하기로 했다.

그는 의식이 맑은 시간을 무조건 늘리거나 고통을 견디는 일을 신앙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잠드는 시간을 늘리는 것도 죽음을 서두르는 처치가 아니라 증상을 줄이는 범위에서 시행됐다.

열째 날에는 짧은 의료동 화상 연결이 허용됐다. 정호는 화면에 오래 나오지 않았다. 산소줄이 콧등을 지나고 오른쪽 손등에는 수액관이 있었다.

“네 얼굴이 더 안 좋아 보인다.”

그가 내게 말했다.

“거울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내 침대에 사람 들어왔어?”

“아직입니다.”

“들어오면 베개 높이 물어봐. 내가 쓰던 대로 두지 말고.”

“직원이 물을 겁니다.”

“그럼 네가 나설 일 없네.”

정호는 웃지 않고 눈을 감았다. 연결 담당 간호사가 통화를 끝낼지 물었고 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유언이 아니라 빈 침대의 다음 사용자를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현재의 부탁이었다.

열한째 날 정호에게 미열과 기침이 늘었다. 의료진은 감염 가능성과 항생제 사용을 설명했다. 정호는 의식이 있을 때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될 가능성과 부작용을 듣고 항생제 단기 사용에는 동의했다. 중환자실 이송과 삽관은 다시 원하지 않는다고 확인했다.

같은 날 저녁 숨참이 심해졌다. 유치관 배액, 산소 조정, 호흡곤란과 불안을 줄이는 약물이 투여됐다. 최 목사에게는 정호가 미리 동의한 범위대로 상태 악화가 통지됐다.

최 목사는 병원에 왔지만 정호가 잠든 뒤였다. 의료진은 깨울지 물었고, 정호가 이전에 `잠들어 있으면 통증·호흡 관리 우선, 방문 때문에 깨우지 않기`라고 말한 기록을 따랐다. 최 목사는 침대 옆에 앉아 있었지만 손을 잡거나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았다.

새벽에는 정호가 질문에 짧게 고개를 움직일 수 있었다. 간호사는 산소와 약물, 심폐소생술·삽관을 하지 않는 계획이 그대로인지 확인했다. 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의식이 흐려졌을 때 의료진은 서명된 연명의료계획에 따라 심폐소생술과 삽관을 시행하지 않았다. 산소를 유지하고 호흡곤란과 통증을 줄이는 약을 조절했다. 흉수관이 당기지 않도록 자세를 바꾸고 입안을 적셨다.

정호는 새벽 네 시 십팔 분에 사망했다.

담당 의사가 호흡과 심장박동, 동공 반응을 확인하고 사망 시각을 기록했다. 최 목사는 의료 연락 대상자로 통지를 받았지만 법적 유족은 아니었다. 은희의 동생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정호가 정한 연락 금지와 별개로 교정기관은 법정 절차에 따른 연고자 확인을 진행했으나, 수취 거절 기록을 마지막 만남 요청에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오전 점검 뒤 공식 통지를 받았다. 윤서진과 나도윤이 함께 왔다.

“이정호 씨가 오늘 새벽 교정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서진이 말했다.

나는 이미 상태 악화 연락을 들었는데도 첫 질문으로 물었다.

“몇 시입니까?”

“오전 네 시 십팔 분입니다.”

“최 목사는 있었습니까?”

“통지 범위상 병원에 있었다는 것까지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무슨 말을 했습니까?”

“정호 씨가 공유에 동의한 기록은 없습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서진은 내가 지금 혼자 있고 싶은지, 의료동 상담 공간에 갈지, 일상 처치를 예정대로 받을지 물었다. 내 몸의 압박 완화와 소변주머니 확인 시간은 정호의 죽음 때문에 사라지지 않았다.

“처치는 예정대로 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 선택이 슬픔을 잘 견디는 태도라는 뜻은 아니었다. 피부는 정해진 시간에 확인해야 했다.

정호의 옛 침대에서는 시트와 베개가 걷혔다. 이미 완화병상으로 옮길 때 개인물품은 처리됐고, 남은 것은 침대 번호표뿐이었다. 직원은 매트리스를 닦고 새 시트를 씌우지 않은 채 비워 두었다.

점심 배식 때 식판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만 들어왔다. 배식 담당은 명단에서 정호 번호가 빠진 것을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나는 내 식판을 탁자 가운데가 아니라 왼쪽에 놓아 달라고 요청했다. 맞은편 자리가 비어 있어도 내 손이 닿는 범위는 달라지지 않았다.

밤에는 정호의 기침 대신 복도 카트 바퀴 소리가 들렸다. 더 조용해졌다고 생각한 순간 내가 그 조용함을 정호의 죽음으로 소유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맞은편 방 문이 닫혀 있었고 환풍기 소리가 더 컸다.

서진은 내가 잠들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수면제부터 권하지 않았다. 오늘 쉬고 싶은 방식과 몸 상태를 물었다. 나는 불을 평소 시간에 끄고 야간 체위 확인도 예정대로 받겠다고 했다.

두 시간 뒤 조은경이 들어와 원하는 자세를 다시 물었다. 정호가 없다고 질문 순서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오른쪽 어깨 때문에 왼쪽으로 기울이고 싶다고 말했다.

아침에는 새 수용자 배정 가능성을 알리는 빈 이름표가 침대 끝에 끼워졌다. 아직 이름은 적히지 않았다. 정호가 쓰던 침대가 영원히 빈 기념물이 되지는 않았다.

예배실 공용 선반에는 정호의 성경이 들어갔다는 수령 기록이 왔다. 반송 확인서 일곱 장은 폐기 담당 두 사람의 확인 아래 세단됐고, 영치금 이십만 원은 이름 없는 일반 피해지원기금으로 이체됐다. 어느 문서에도 은희나 동생의 이름은 없었다.

최 목사는 짧은 메모를 보냈다.

`이정호 씨의 요청 범위에 따라 장례·유품 절차에 협조하겠습니다.`

신의 뜻이나 용서라는 말은 없었다.

나는 종이 한 장을 꺼내 `정호 형에게 배운 것`이라고 썼다. 첫 문장으로 `사람은 마지막까지 자기 몫을 선택할 수 있었다`고 적었다.

곧 줄을 그었다.

정호가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암의 진행도, 완화병상에 빈 자리가 나는 시점도, 새벽에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도 고르지 못했다. 그가 고른 것은 일부 검사와 치료, 연락과 물건의 처리였다.

나는 두 번째 문장을 쓰지 않았다.

유리나 수진에게 정호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알지 못했고, 내 상실을 위로할 의무가 없었다.

사흘 뒤 서기현이 보완면담 통지를 보냈다. 가석방 일정은 여전히 재검토 중이었지만 추가 자료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면담실 책상에는 새 양식이 놓여 있었다.

`동료 수용자 돌봄 및 사별 경험을 통한 의미와 변화.`

서기현은 이 항목이 장기 수용생활의 관계 변화와 책임 수행을 평가하는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제출하면 심사에 도움이 됩니까?”

내가 물었다.

“구체적 생활 변화 자료로 검토될 수 있습니다.”

“정호 형이 죽은 일을 쓰는 건데요.”

“제출 여부와 내용은 한재호 씨가 결정합니다.”

빈칸은 한 장의 절반을 차지했다.

정호가 남기지 않은 마지막 뜻을 내가 채우면, 심사자는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