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39 / 50
나는 `제출하지 않음` 칸에 표시했다.
서기현은 사과문 사본을 요구하지 않았다. 제출 선택서만 받아 날짜와 내 번호를 확인했다.
“보완자료에는 어떻게 적습니까?”
내가 물었다.
“당사자 의견서 작성 진술 있음, 사본 미제출로 내용 확인 불가라고 적습니다.”
“피해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제출하지 않은 건요?”
“교정 기록에 내지 않는 것과 피해자에게 보내지 않는 것은 다른 선택입니다.”
“심사자에게 보여 주는 순간 사과가 평가자료가 되니까 안 낸 겁니다.”
말하고 나니 그 이유도 기록되기를 기다리는 문장처럼 들렸다.
“그 설명을 추가 진술로 적을까요?”
서기현이 물었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
“아니요.”
“그러면 작성 여부와 사본 미제출만 남깁니다.”
화면에는 두 줄이 생겼다.
`당사자 의견서 또는 사과문을 작성했다고 진술함.`
`사본 제출하지 않아 내용 확인 불가.`
책임 사실도, 내가 지운 문장도, 보내지 않은 이유도 심사자는 볼 수 없었다. 미발송 글을 평가에 쓰지 않기로 한 선택이 실제로 자료 한 칸을 비웠다.
“구체적 책임 인식 자료가 부족하다고 볼 수 있습니까?”
“기존 면담과 사건자료가 있습니다. 다만 이번 문서 내용은 검토할 수 없습니다.”
“그게 다음 심사에 불리할 수도 있겠네요.”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서기현은 내 결정을 존중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제출하지 않은 종이는 평가받지 않았다.
의료동으로 돌아와 사과문 봉투를 개인 보관함에 다시 넣었다. 수신인은 없었고 봉투도 열려 있었다. 피해자도 심사자도 읽지 않는 글이었다.
내가 혼자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남았다. 필요할 때마다 꺼내 내가 어떤 문장을 지웠는지 확인하고, 지웠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도 있었다.
나는 봉투를 사진 아래에 숨기지 않고 서류 칸 맨 뒤에 세웠다. 보이지 않게 감추지도, 가장 앞에 전시하지도 않았다.
그날의 규칙 종이에는 한 줄만 썼다.
`오늘 하지 않은 일을 설명해서 점수로 만들지 않는다.`
점심 때 정호가 새 집게로 내 침대 아래 떨어진 양말을 집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물 한 병 채워 달라고 안 해?”
그가 물었다.
“필요하면 따로 부탁하겠습니다.”
“지금은?”
나는 물병을 보았다. 절반 남아 있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정호는 집게를 자기 걸이에 걸었다. 교환은 생기지 않았다. 나는 그 일을 규칙 종이에 쓰지 않았다.
오후에 손병규가 예비 세탁망 배부 시간을 물었다. 나는 게시판의 시간만 읽어 주었다. 왜 내가 이번에는 질문 범위만 답하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병규는 고개만 끄덕이고 갔다.
두 번의 행동을 지켰다고 세기 시작했다. 나는 규칙 종이를 접어 서랍에 넣었다. 세는 마음은 남았지만 기록을 만들지는 않았다.
저녁 법률 우편에는 서준호의 긴 설명서와 선택 문서 두 장이 들어 있었다.
사건 관련자료 1차 보호 검토가 끝나면서 공적 사고기록 정정 절차가 시작된다고 했다. 기존 사고 요약에는 최초 계측값과 김도현의 보류 의견, 내 최종 승인 문구가 빠져 있었다. 관계 당사자는 확인된 자료를 근거로 사실확인 진술을 제출할 수 있었다.
회사 측은 공동 정정문 초안을 제안했다.
`경영진의 일정 압박과 현장 보고체계의 한계 속에서 초기 계측 이상값이 최종 보고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고, 관련 관리자들의 진행 판단으로 작업이 시행되었다.`
조직 책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정 압박과 보고체계 문제도 적혀 있었다. 그러나 `관련 관리자들` 안에는 내 이름과 `내가 승인한 것으로 하라`는 말이 없었다.
공동 정정문에 동의하면 회사와 관계자들이 같은 문서로 기록을 수정할 수 있었다. 공개 범위에서는 개인 이름과 음성 문구를 익명 처리하고, 세부 자료는 보호 절차 안에 남겼다.
다른 선택지는 내 개인 명의의 사실확인 진술이었다.
초안에는 내 이름과 당시 직책이 적혀 있었다.
`한재호는 최초 기준 초과값과 작업 보류 의견을 인지한 상태에서 집중작업 시행을 최종 승인하였다.`
`사고 후 보고서에서 작업 범위를 축소하는 문구 변경에 동의하였고, 재측정값 기준으로 보고를 정리하라고 지시하였다.`
회사 압박과 보고체계 문제는 별도 항목에 함께 적혔다. 개인 책임만 남기고 조직 책임을 지우는 문서도 아니었다.
개인 진술을 제출하고 공개에 동의하면 정정 결정문과 첨부 목록에 내 실명이 남았다. 회사는 사실관계 범위와 영업상 손해를 이유로 추가 대응할 수 있었고, 민형사 절차에서 진술이 사용될 수도 있었다. 교정기관은 새 공개 진술이 기존 자기성찰서와 다른지 다시 검토할 수 있었다.
한번 정정 기록에 편입된 뒤에는 내가 마음을 바꿔도 회수하기 어려웠다.
서준호는 메모 끝에 썼다.
`사과문 전달과 무관한 절차입니다. 목적은 공적 사고기록의 사실 정정입니다. 어느 안을 택해도 회사 책임 검토는 계속됩니다.`
나는 공동 정정문을 다시 읽었다. 틀린 문장은 아니었다. `관련 관리자들`이라는 말이 너무 넓어 내가 없어졌을 뿐이었다.
개인 사실확인서도 완전한 사고 보고서는 아니었다. 내 승인과 기록 축소 관여가 이름 옆에 놓였고, 회사 압박은 뒤에 별도 사실로 남았다.
다음 날 나는 서준호에게 접견을 신청했다. 두 초안을 투명 칸막이 아래 나란히 놓았다.
“공동 정정문에 참여하면 제 승인 사실이 비공개 자료에는 남습니까?”
“세부 자료에는 남습니다. 공개 정정문에서 개인을 익명화하는 겁니다.”
“그럼 사실을 숨기는 것은 아니네요.”
“보호절차 안의 기록과 대중에게 공개되는 기록의 범위가 다른 겁니다.”
“피해자 측은 세부 자료를 받습니까?”
“허용된 범위에서 받습니다. 개인 승인 관련 자료도 포함됩니다.”
공동 정정문을 선택해도 박미영 측이 내 이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공개된 문장에서만 `관련 관리자들`이 됐다.
“개인 진술을 공개하면 회사 책임이 약해질 수 있습니까?”
“문안상 회사 압박과 보고체계 문제도 병기돼 있습니다. 다만 회사가 개인 판단을 더 강조하는 대응을 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쓰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확인 범위를 승인과 보고 문구 관여로 제한했습니다. 법적 책임 비율은 별도 판단입니다.”
“회사가 저를 상대로 새 소송을 할 수 있습니까?”
“진술 내용이 허위이거나 비밀유지 의무를 위반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확인된 자료 범위로 작성했지만 대응 자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기존 민사 책임의 재산정이나 구상 주장에 활용될 가능성도 검토해야 합니다.”
“저는 교도소 안에 있고 재산도 거의 없습니다.”
“손해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출소 뒤 소득과 재산, 법률 비용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선택서 모서리를 눌렀다.
“가석방에는요?”
“공개 진술이 기존 반성 자료와 일치한다고 볼 수도 있고, 과거 자료가 책임을 축소했다고 재검토할 수도 있습니다. 심사 일정이 다시 늦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을 더 정확히 말하는데 불리할 수 있습니까?”
“심사는 도덕 점수 하나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새 자료가 나오면 사실관계와 기존 진술을 비교합니다.”
나는 회사 공동문안의 `관련 관리자들`에 밑줄을 그었다.
“이 표현을 `현장 총괄책임자를 포함한 관련 관리자들`로 바꾸고 이름만 빼면 안 됩니까?”
“수정 제안은 할 수 있습니다. 회사가 동의할지는 모릅니다.”
“개인 진술은 제출하되 실명 공개만 나중에 정할 수는요?”
“비공개 제출 단계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 선택 문서는 정정 결정문에 실명 포함 여부까지 묻고 있습니다. 공개 동의를 미루면 이번 결정문에는 익명 처리됩니다.”
“나중에 공개할 수 있습니까?”
“별도 절차를 다시 시작할 수는 있지만 같은 기회와 범위가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어느 선택도 임시로 표시해 두는 칸은 아니었다.
“사과문을 개인 진술에 붙이면 됩니까?”
“권하지 않습니다. 사실기록 정정과 피해자에게 보내지 않은 사과문은 목적이 다릅니다.”
“공개하면 피해자도 볼 수 있잖습니까.”
“볼 가능성은 있지만 읽으라고 보내는 문서가 아닙니다. 공개 진술에 사과를 붙이면 결과적으로 우회 전달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개인 보관함에 둔 봉투를 생각했다. 심사자료로 제출하지 않은 뒤 공적 기록에 붙이면 다른 길로 같은 평가를 얻으려는 일이 됐다.
“사과문은 붙이지 않겠습니다.”
서준호는 그 결정을 칭찬하지 않았다. 개인 진술의 사실 문구마다 근거 자료 번호만 확인했다.
“최초 계측값 인지와 승인 음성, 회신 문구, 사고보고서 수정 이력은 확인된 범위입니다. 다만 공개되면 문장만 따로 인용될 수 있습니다.”
“제가 설명할 기회는 있습니까?”
“언론이나 회사 대응이 생기면 별도 입장을 낼 수 있지만, 공개 문장을 누가 어떻게 읽을지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잘못 읽으면요?”
“정정할 사실이 있으면 대응할 수 있습니다. 해석 전체를 관리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공동문안을 선택하면 사람들이 회사 책임만 보고 내 이름은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 진술을 선택하면 회사가 내 이름을 방패로 쓸 수도 있었다. 어느 쪽도 독자의 해석을 내 뜻대로 고정하지 못했다.
“결정 기한은 언제입니까?”
“사흘 뒤 오후 다섯 시입니다. 철회는 제출 전까지만 가능합니다. 공개 결정문에 편입된 뒤에는 사실 오류가 아닌 단순 변심으로 삭제하기 어렵습니다.”
서준호는 두 선택서를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두 문서 아래에는 각각 선택 칸이 있었다.
`회사 공동 정정문 참여. 개인 식별정보 비공개.`
`개인 사실확인 진술 제출 및 공개 동의.`
두 번째 칸의 괄호 안에는 내 이름이 인쇄돼 있었다.
`한재호.`
사과문 봉투에는 없는 수신인 대신, 공개 동의 칸에는 내 이름이 먼저 들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