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건너는 해
오늘만 지키는 규칙

에피소드 38 / 50

서기현은 당사자 의견서를 작성했는지 물었다.

가석방 보완면담의 첫 질문은 아니었다. 그는 자료 제공 절차와 의료동 생활기록을 확인한 뒤, 선택 문서 목록에서 빈 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의견서 양식을 받으셨죠?”

“받았습니다.”

“작성 여부는 선택입니다. 제출하지 않아도 불이익 사유로 적지 않습니다.”

나는 `작성했지만 보내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문장에는 책임을 인정한 일과 피해자 경계를 존중한 일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사과문을 작성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서기현은 작성 여부 칸에 표시했다.

“제출 또는 전달하셨습니까?”

“아니요. 피해자에게 답변이나 평가를 요구할 수 있어서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 말을 그대로 기록했다.

`피해자 응답 부담을 고려해 현재 미전달 상태라고 진술.`

문장이 화면에 생기자 나는 내가 원한 것을 얻은 것 같았다. 사과문은 피해자에게 가지 않았지만, 심사 담당자는 내가 왜 보내지 않았는지 알게 됐다.

“그 문장이 심사자료에 들어갑니까?”

“면담 진술로 남습니다.”

“제가 피해자 경계를 고려했다는 뜻으로 읽힙니까?”

서기현이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저는 의미를 대신 평가하지 않습니다. 한재호 씨가 그렇게 진술했다는 기록입니다.”

“좋게 보일 수는 있잖습니까.”

“모든 진술은 평가자가 읽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제가 약속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미발송 선택을 평가 문장으로 바꿨다. 피해자에게 읽는 일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심사자에게 그것을 알아 달라고 말했다.

“방금 설명은 기록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미 한 진술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추가 설명이나 정정은 남길 수 있습니다.”

“정정하면 더 길어지겠네요.”

“그렇습니다.”

나는 정정을 요청하지 않았다. 침묵을 존중했다는 자기평가를 지우기 위해 또 다른 자기평가를 붙이고 싶지 않았다.

면담 뒤 생활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타인의 침묵을 해석하지 않는다.`

첫 줄은 전날 확인한 것을 규칙으로 만든 문장이었다. 나는 그 아래에 썼다.

`요청받지 않은 사과를 보내지 않는다.`

`내 책임을 설명 뒤에 숨기지 않는다.`

세 줄을 읽으니 사람들에게 보여 줄 생활 원칙처럼 보였다. 지키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으려면 벽에 붙이거나 서기현에게 제출할 수도 있었다.

정호가 내 어깨 너머로 종이를 보았다.

“또 반성문이야?”

“규칙입니다.”

“누구 규칙.”

“제 규칙이요.”

“평생 지키게?”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정호는 새 집게로 침대 아래 슬리퍼를 끌어당겼다.

“오늘 저녁 약도 안 잊는다는 약속부터 해.”

“그것과 다릅니다.”

“다르겠지.”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평생`이라는 말을 종이 위에는 쓰지 않았는데도 이미 그렇게 읽고 있었다. 한 번 어기면 거짓말이 되고, 오래 지키면 변한 사람의 증거가 되는 규칙이었다.

세 줄 아래에 날짜를 썼다.

`오늘 우편함에 사과문을 넣지 않는다.`

`오늘 질문받은 범위만 답한다.`

`오늘 필요한 도움을 거래로 만들지 않는다.`

규칙은 하루 안으로 줄었다.

오후 배식 전에 정호가 빈 물병을 들고 세면대 쪽으로 갔다. 내 물병도 거의 비어 있었다. 오른쪽 어깨 때문에 휠체어를 돌려 정수기까지 가는 동작을 줄이고 싶었다.

“형, 제 것도 채워 주십시오.”

내가 말했다.

정호가 돌아보았다.

“그냥?”

새 집게를 빌려 주는 대가로 식판을 가져오라고 했던 일을 묻는 말이었다.

“네. 어려우면 안 해도 됩니다.”

“줘 봐.”

나는 물병을 건넸다. 정호는 두 병을 채워 돌아왔다. 나는 고맙다고 말했고, 집게나 식판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행동을 규칙 옆에 성공 표시로 적고 싶었다. 쓰지 않았다.

점심 뒤 손병규가 시설 담당이 언제 다시 오는지 물었다.

“한 달 뒤 재검토라고 했습니다.”

나는 질문에 답했다.

“예비망 두 장으로 늘리는 얘기는 들었어요?”

“저는 추가망을 기다린 사례가 기록됐습니다. 병규 씨 기록은 모릅니다.”

거기서 멈추면 됐다.

“제가 평가서에 조건을 안 썼으면 거치대가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덧붙였다.

병규의 얼굴이 굳었다.

“그 얘기를 왜 지금 해요?”

“결과를 설명하려고—”

“내가 물은 건 다음 일정이었습니다.”

그는 돌아갔다.

나는 두 번째 규칙을 보았다. `오늘 질문받은 범위만 답한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어겼다. 병규에게 내 선택과 손해를 알아 달라는 설명을 붙였다.

종이에 실패 표시를 할까 생각했다. 실패를 정직하게 기록한 사람이 되는 방식도 있었다.

나는 표시하지 않고 병규를 찾아갔다. 방 앞에서 더 설명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한 문장만 말했다.

“묻지 않은 말을 덧붙였습니다. 미안합니다.”

병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안 해도 됩니다”라고 말할 뻔했다. 그것도 그의 침묵을 관리하는 문장이었다. 나는 돌아섰다.

저녁 우편 등록 때 도윤이 발송물을 물었다. 나는 없다고 말했다. 개인 보관함을 열어 확인하지도 않았다. 첫 번째 하루 규칙은 그 시각까지 지켜졌다.

두 번째는 실패했고, 세 번째는 정호가 물병을 가져다준 한 번만 거래 없이 끝났다. 세 줄 중 몇 개를 지켰는지 세기 시작하자 규칙은 다시 점수가 됐다.

나는 종이를 접어 제출 서류가 아니라 탁자 서랍에 넣었다.

밤 점검 뒤 다시 꺼내 보니 세 규칙의 크기가 달라 보였다. 우편함에 넣지 않는 일은 도윤이 묻는 순간 한 번 선택하면 됐다. 질문 범위만 답하는 일은 대화할 때마다 다시 판단해야 했다. 도움을 거래로 만들지 않는 일은 내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늦게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나는 규칙 옆에 실행 방법을 적으려 했다.

`말하기 전 세 번 생각한다.`

세 번이라는 숫자는 근거가 없었다. 두 번 생각하고도 병규에게 덧붙일 수 있었고, 네 번 생각하다 상대를 기다리게 할 수도 있었다.

`아무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질문에 필요한 사실까지 숨기는 규칙이 됐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마음속 기대를 명령으로 없앨 수는 없었다. 기대가 생긴 뒤에도 조건을 붙이지 않는 행동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세 줄을 더 구체적으로 고쳤다.

`묻지 않은 동기를 덧붙이기 전에 멈춘다.`

`도움을 요청할 때 내가 해 줄 일을 조건으로 걸지 않는다.`

`상대가 답하지 않으면 두 번째 질문을 보내지 않는다.`

그 문장들도 완벽하지 않았다. 무엇이 동기이고 필요한 맥락인지 매번 같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 할 동작은 이전보다 보였다. 멈추고, 조건을 붙이지 않고, 두 번째 연락을 보내지 않는 일이었다.

정호는 불을 끄기 전에 종이를 읽었다.

“내일도 새로 써?”

“필요하면요.”

“오늘 못 지킨 건?”

“내일 다시 확인해야겠죠.”

“그럼 오늘 종이는 쓸모없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교훈으로 고치지 않았다. 종이는 하루가 끝나면 어제의 규칙이 됐다.

다음 날 서기현이 추가 면담 통지를 보냈다. `작성했으나 피해자에게 전달하지 않은 당사자 의견서 또는 사과문을 자기성찰 부속자료로 제출할 수 있음`이라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

피해자에게 보내지 않고도 심사자는 읽을 수 있었다. 수신인의 동의도 필요 없었다. 내 사과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여 줄 수 있었다.

추가 면담에서 서기현은 부속자료의 사용 범위를 설명했다.

“제출하면 교정 평가 기록에 편철되고 심사 검토자가 볼 수 있습니다. 피해자 측으로 자동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제출하는 게 유리합니까?”

“책임 인식과 향후 행동 계획을 판단하는 참고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참고가 된다는 건 유리할 수도 있다는 뜻이잖습니까.”

“유리하거나 불리한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문서 내용과 다른 자료를 함께 봅니다.”

“제출하지 않으면 사과를 안 한 사람으로 봅니까?”

“이미 작성했다고 진술하셨습니다. 사본이 없으면 검토자는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고 적습니다.”

나는 봉투에서 사과문을 꺼내지 않았다.

“피해자에게 보내지 않은 이유도 같이 적을 수 있습니까?”

“부속 설명을 제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왜 보내지 않았는지 오해하지 않겠네요.”

“설명을 읽고 어떻게 판단할지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초안에 그은 검은 줄을 떠올렸다. 회사 압박과 내 척수손상, 오래 후회했다는 문장을 지운 흔적까지 제출하면 결과물보다 변화 과정이 더 잘 보일 수 있었다.

“초안 세 장을 모두 내도 됩니까?”

“본인이 부속자료로 선택하면 가능합니다. 다만 피해자에게 보내는 문서가 아니라 교정 평가를 위한 자료가 됩니다.”

“지운 문장을 보면 제가 무엇을 걷어냈는지 알 수 있잖습니까.”

“그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제출하는 겁니까?”

서기현의 질문에 나는 바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말하고 나서 목적이 선명해졌다. 피해자에게 설명과 자기평가를 요구하는 문장을 지운 뒤, 그 삭제를 심사자에게 보여 주어 평가받으려 했다.

“그 목적이 나쁩니까?”

“저는 동기를 판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문서가 누구를 위한 어떤 기록이 되는지는 구분하셔야 합니다.”

“최종본만 내면요?”

“최종본 내용이 평가자료가 됩니다.”

“아무것도 안 내면요?”

“작성 진술만 남고 사본은 없습니다.”

서기현은 세 선택을 같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초안 전체, 최종본만, 사본 없음. 어느 쪽에도 `진정한 사과` 표시는 붙지 않았다.

나는 봉투를 열어 최종본을 꺼냈다. 수신인 없는 종이에 책임 사실과 사과한다는 문장만 있었다. 피해자는 읽지 않았고, 심사자는 내 선택만 하면 읽을 수 있었다.

“사본을 제출하면 나중에 피해자에게 보냈다고 말할 수는 없죠?”

“그렇습니다. 교정 기록 제출과 피해자 전달은 전혀 다른 절차입니다.”

“그런데 심사자료에는 사과문이라고 적힙니다.”

“제목과 성격을 `미전달 사과문 초안`으로 명시할 수 있습니다.”

그 정확한 이름은 내가 얻고 싶은 효과를 줄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과문 제출`보다 `미전달 초안 제출`은 덜 완성돼 보였다.

서기현은 제출 선택서를 내 앞으로 밀었다.

안내서 아래에는 두 칸이 있었다.

`사본 제출.`

`제출하지 않음.`

나는 사과문 봉투와 사본 제출 칸을 나란히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