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건너는 해
내 칸만 서명했다

에피소드 35 / 50

시설 요청의 최종안은 내가 원한 거치대가 아니었다.

세탁망은 각 침상에 예비 한 장씩 지급하고, 다 쓴 예비망은 정해진 배부 시간에 새것으로 바꾸기로 했다. 시간 밖에 추가로 필요하면 직원에게 요청하는 방식은 그대로 남았다.

시설 담당은 공용공간 탁자에 결정서를 펴 놓고 설명했다.

“당김식 거치대는 휠체어 접근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손잡이 당김과 해제 레버 사용 조건이 달랐습니다. 통로 폭과 관리 책임까지 포함하면 현재 시제품을 고정 설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레버만 바꾸면 되지 않습니까?”

내가 물었다.

“다른 형식의 제품도 검토했지만 벽 고정과 돌출 폭 기준을 함께 맞춰야 합니다. 예비망 개별 지급으로 먼저 운영하고 불편 사례를 다시 모으겠습니다.”

“저는 시제품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점도 기록돼 있습니다.”

“그럼 제게만 사용하게 둘 수도 있잖습니까.”

“공용 통로에 설치한 설비를 특정 수용자 전용으로 관리하려면 보관과 잠금 방식이 추가로 필요합니다. 지금은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사 구멍 네 개가 남은 벽을 보았다.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망이 있었던 시간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사용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도 결과는 사라졌다.

손병규는 결정서를 읽고 말했다.

“예비 한 장 다 쓰면 또 사람 불러야 하네요.”

“사용량을 보면서 지급 수량은 조정할 수 있습니다.”

시설 담당이 대답했다.

“내가 말한 건 내가 필요할 때 직접 꺼내는 거였습니다.”

“그 요구가 전부 반영되지 않은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운영 뒤 재검토 시점을 한 달 후로 잡았습니다.”

병규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나도 그에게 거치대를 다시 요구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내 평가서에 조건을 쓰지 않았더라면 시제품이 남았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병규의 선택을 대신 끝내는 방식이었다는 사실도 바뀌지 않았다.

시설 담당은 `요청 해소 확인서` 두 장을 내놓았다. 한 장에는 내 번호가, 다른 장에는 병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각자 적용된 조치를 확인한 뒤 서명해 주세요. 서명이 곧 만족한다는 뜻은 아니고, 설명을 듣고 물품을 받았다는 확인입니다. 남은 불편은 의견란에 쓸 수 있습니다.”

내 확인서의 본문에는 `접근 불편 해소: 개인별 예비 세탁망 지급 및 직원 배부`라고 적혀 있었다.

“접근 불편이 해소됐다고 돼 있습니다.”

“예비망 한 장이 침상에 있으니 최초 사용 접근은 해결된 것으로 분류했습니다.”

“두 번째가 필요하면 다시 직원에게 요청해야 합니다.”

“그 부분을 의견란에 적을 수 있습니다.”

“해소가 아니라 일부 해소 아닙니까?”

시설 담당은 문구를 살펴보았다.

“분류 항목은 해소 또는 미해소 두 가지지만, 세부 상태에 조건을 남길 수 있습니다.”

나는 `해소`라는 단어에 줄을 긋고 싶었다. 확인서 전체를 거부하면 시설 결정이 다시 돌아갈 것 같기도 했다.

“서명하지 않으면 재검토합니까?”

“수령 거부로 기록하고 이유는 확인합니다. 시설안 자체가 자동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내 서명으로 거치대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서명하지 않는 것이 더 강한 통제처럼 보였지만, 결과를 바꾸는 힘은 아니었다.

나는 의견란에 썼다.

`본인은 침상에 둔 예비망 1장에 직접 접근 가능함. 추가 필요 시 직원 요청은 남아 있음. 손병규의 사용 가능 여부와 요구 해소를 대신 확인하지 않음.`

“마지막 문장은 이 서류에 꼭 필요합니까?”

시설 담당이 물었다.

“처음 요청이 제 이름 하나로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개인별 서류입니다.”

“그래서 제 범위만 적었습니다.”

나는 내 칸에 서명했다.

병규는 자기 확인서를 무릎 위에 놓고 오래 읽었다. 나는 그의 의견란을 보지 않으려고 휠체어를 조금 돌렸다. 그는 내 펜을 빌리지 않고 시설 담당에게 다른 펜을 요청했다.

“서명하지 않아도 됩니까?”

병규가 물었다.

“네. 수령한 예비망은 사용할 수 있고, 미서명 이유만 기록하겠습니다.”

병규는 의견란에 몇 줄을 썼다. 마지막에 서명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시설 담당은 그 종이를 접어 자기 서류철에 넣었다.

“뭐라고 썼는지 안 물어요?”

병규가 내게 말했다.

“병규 씨 칸이잖습니까.”

“이제 와서.”

그 말이 맞았다. 처음에는 내가 그의 부탁을 내 이름으로 넣었다. 지금 칸을 비워 둔 행동이 그 일을 없애지는 않았다.

예비 세탁망은 접힌 채 각 침상 탁자 아래 고리에 걸렸다. 내 것은 왼손으로 닿는 위치였다. 병규의 것은 그의 오른손 쪽에 놓였다. 직원은 두 사람에게 각각 직접 꺼내 보게 했다.

나는 망을 꺼냈다가 다시 걸었다. 시제품보다 동작은 쉬웠다. 그러나 한 장을 사용한 뒤 새것으로 바꾸는 일은 배부 시간과 직원에게 이어졌다.

“한 달 동안 사용 기록을 모으겠습니다.”

시설 담당이 말했다.

결정은 끝난 것이 아니라 다음 검토 전까지의 방식으로 남았다.

다음 날 오전 나는 갈아입은 환자복을 예비 세탁망에 넣었다. 탁자 아래 고리는 왼손으로 닿았고, 접힌 망을 펴는 데 직원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다. 망 입구를 침대 난간에 걸어 두고 옷을 넣은 다음 끈을 당겼다.

내 기록표에는 `개별 예비망 독립 사용 가능`이라고 적혔다.

점심 뒤 물병 뚜껑이 덜 닫혀 침대 시트 한쪽이 젖었다. 직원이 시트를 갈아 주었고 젖은 세탁물은 별도 망에 넣어야 했다. 오전에 받은 예비망은 이미 수거함으로 갔다. 정해진 오후 배부 시간까지는 사십 분이 남아 있었다.

나는 빈 고리를 만졌다. 시제품이 있었다면 직접 망을 꺼냈을 것이고, 예비망이 두 장이었다면 호출하지 않아도 됐다.

“추가 세탁망이 필요합니다.”

도윤에게 말했다.

“지금 다른 방 이동 보조가 있습니다. 젖은 시트는 방수 바구니에 잠시 분리해 둘게요. 끝나고 가져오겠습니다.”

직원은 젖은 시트가 피부나 바닥에 닿지 않도록 뚜껑 있는 바구니에 넣었다. 나는 침대에서 새 시트를 확인하고 기다렸다. 십칠 분 뒤 도윤이 망을 가져왔다.

“예비망 지급으로 해결됐다고 했는데 또 기다렸습니다.”

내가 말했다.

“추가 필요 사례로 기록하겠습니다.”

“그 기록이 거치대 설치로 이어집니까?”

“한 달 뒤 검토 자료가 됩니다. 어떤 결정을 할지는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도윤은 `예비망 사용 후 추가 발생, 17분 대기, 방수 바구니 임시 분리`라고 적었다. 내가 기다린 시간이 원하는 설비를 얻는 표가 되지는 않았다.

복도 반대편에서 병규도 예비망을 꺼냈다. 그는 오른손으로 고리를 잡고 망을 탁자 위에 펼쳤다. 첫 사용은 혼자 가능했다.

“내 기록에 성공이라고만 쓰겠죠.”

병규가 말했다.

“추가로 필요한 게 있으면 직접 말하십시오.”

“한재호 씨한테 안 말합니다.”

“직원에게요.”

병규는 망을 접어 자기 방식대로 다시 걸었다. 우리 둘에게 같은 물건이 주어졌지만 남은 불편은 같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의견란에 썼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날 오후 물품 게시판에 긴 집게 수리 완료 한 건과 새 교체 물량 두 개가 도착했다는 안내가 붙었다. 나는 공지를 정호보다 먼저 보았다. 정호는 침대에서 소염진통제를 먹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내게만 알려진 정보는 아니었다. 게시판에 붙었지만 정호의 자리에서는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정호 형.”

“왜.”

“집게 수리품과 새 물량이 왔다는 공지가 붙었습니다. 형 이름이 대상인지 직원에게 확인하십시오.”

“네가 봐 주면 안 돼?”

“대상 명단은 공지에 없습니다.”

“그럼 같이 가.”

나는 휠체어를 돌렸다. 정호는 천천히 일어나 나와 물품함 쪽으로 갔다.

나도윤은 정호의 이름과 기존 점검 기록을 확인했다. 균열 난 집게발은 수리가 불가능해 새 교체 물량 대상이 됐다고 설명했다. 정호가 직접 손잡이를 눌러 보고 사용 목적을 다시 확인한 뒤 새 집게 하나를 지급했다.

나는 순서를 말하지 않았고, 정호 대신 필요를 설명하지도 않았다.

“이번엔 말해 줬네.”

정호가 새 집게로 바닥의 수건을 집으며 말했다.

“공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못 봤잖아.”

그는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나도 사과하지 않았다. 새 집게는 그가 먼저 공용 도구를 쓴 시간을 돌려주지 못했다.

저녁 점검 뒤 서준호의 우편이 도착했다.

사건 관련자료 제공 일정은 보호절차 단계에 들어갔고, 박미영 측에는 자료 범위와 예상 시기만 전달됐다고 적혀 있었다. 상대 측은 내 감정이나 해명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 아래에는 법률절차에서 선택적으로 제출할 수 있는 `당사자 의견서` 안내가 붙어 있었다. 사건 경위나 책임에 관한 개인 의견을 한 장 이내로 작성할 수 있고, 제출 전 전달 대상과 범위를 별도로 선택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서준호는 메모를 덧붙였다.

`작성과 전달은 별개입니다. 작성하더라도 제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피해자 측이 요청한 문서가 아닙니다.`

빈 양식의 첫 칸은 `이 의견서를 누구에게 전달하기를 원하는가`였다.

나는 아무 항목에도 표시하지 않았다.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상대가 읽는 일도, 시설이 원하는 설비를 설치하는 일도 아니었다.

지금 내 앞에는 쓰거나 쓰지 않을 수 있는 빈칸만 있었다.

선택은 아직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