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건너는 해
사용 가능, 조건부

에피소드 34 / 50

당김식 거치대 시제품은 사흘 뒤 세탁망 선반 반대편에 설치됐다.

벽에서 접혀 나온 얕은 철제 판 앞에 둥근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손잡이를 아래로 당기면 판이 허리 높이까지 내려오고, 놓으면 천천히 원래 자리로 올라가는 구조였다. 시설 담당은 빈 세탁망 열 장을 판 위 상자에 넣었다.

“최초 요청자부터 사용 평가하겠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손병규는 자기 방 문 앞에 서 있었지만 다가오지 않았다. 시설 담당이 함께 시험할 의사가 있는지 묻자 그는 말했다.

“한재호 씨 먼저 하세요. 원래 그 사람 요청이잖아요.”

전날 면담 기록에는 두 이름이 따로 있었지만 병규의 목소리에는 처음 접수표의 이름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나는 휠체어를 거치대 앞에 세웠다. 발판과 벽 사이에는 주먹 두 개 정도 공간이 남았다. 뒤로 돌아 나갈 때도 바퀴가 맞은편 탁자에 닿지 않았다.

“손잡이에 닿습니까?”

시설 담당이 물었다.

나는 왼팔을 뻗었다. 손잡이는 손가락 첫마디 안쪽에 걸렸다. 몸을 앞으로 과하게 숙일 필요는 없었다.

“닿습니다.”

“당겨 보세요.”

손잡이를 움켜쥐고 아래로 내리자 스프링이 버티는 힘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판이 절반만 내려왔다. 나는 손가락을 다시 감고 팔꿈치를 몸 쪽으로 당겼다. 판이 무릎 높이까지 왔다.

“오른쪽 어깨는 쓰지 않았습니까?”

윤서진이 옆에서 물었다.

“왼손으로만 당겼습니다.”

“몸통을 버틸 때 오른쪽 통증은요?”

“없습니다.”

나는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오른손으로 상자에서 세탁망 하나를 꺼냈다. 한 손으로 손잡이를 계속 잡아야 해서 망을 꺼내는 손은 오른손뿐이었다. 오른쪽 어깨가 묵직했지만 팔을 높이 들 필요는 없었다.

“손잡이를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물었다.

“완충장치 때문에 천천히 올라갑니다. 손이나 망이 끼이지 않는지는 확인했습니다.”

나는 손을 폈다. 판이 천천히 올라갔다. 세탁망은 내 무릎 위에 남았다.

두 번째에는 손잡이를 당긴 뒤 판 옆 고정 홈에 걸었다. 손을 놓아도 판이 내려온 상태로 유지됐다. 망을 꺼낸 다음 작은 해제 레버를 눌러야 올라갔다.

“이 방식이면 한 손을 계속 잡고 있지 않아도 됩니다.”

시설 담당이 말했다.

나는 해제 레버를 눌렀다. 레버는 엄지와 검지로 집듯 눌러야 했다. 장갑을 끼거나 손가락이 굳은 사람에게 쉬운지는 알 수 없었다.

“한 번 더 해 보겠습니다.”

시설 담당은 꺼낸 세탁망을 상자에 다시 넣었다.

두 번째에는 휠체어를 손바닥 하나만큼 오른쪽에 세웠다. 손잡이에 닿기는 했지만 당기는 동안 왼쪽 바퀴가 조금 돌아갔다. 나는 오른손으로 바퀴 테를 눌러 고정했다. 오른쪽 어깨가 순간적으로 당겼다.

“통증 있습니까?”

서진이 물었다.

“바퀴가 돌아서 오른손으로 잡을 때 조금 있었습니다.”

시설 담당은 바닥에 휠체어 앞바퀴 위치를 표시했다.

“이 선 안에 맞춰야 안정적이라는 뜻입니까?”

내가 물었다.

“지금 시험에서는 그렇습니다. 모든 휠체어 크기에 같은지는 더 봐야 합니다.”

세 번째에는 고정 홈을 사용하지 않고 손잡이를 잡은 채 망을 꺼냈다. 왼손으로 당김을 유지하고 오른손을 뻗자 몸통이 비틀렸다. 망 끝이 상자 안 다른 망과 걸렸다.

“잠깐 멈추세요.”

서진이 말했다.

나는 망을 놓고 상체를 등받이에 붙였다. 오른쪽 어깨는 가만히 있을 때는 아프지 않았지만 팔을 다시 들면 묵직했다.

“고정 홈을 쓰는 방법이 낫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럼 그 방법으로 세 번 연속 해 보겠습니다.”

나는 판을 내려 홈에 걸고, 망을 꺼내 무릎에 놓은 뒤 레버를 눌렀다. 첫 번째는 문제없었다. 두 번째에는 레버를 누른 엄지가 미끄러져 판이 올라가지 않았다. 손가락 위치를 바꿔 다시 누르자 작동했다. 세 번째에는 손잡이를 당기는 왼팔에 피로가 왔지만 끝까지 내릴 수 있었다.

시설 담당은 성공 횟수만 적지 않았다. 휠체어 위치 조정, 고정 홈 사용, 엄지 미끄러짐, 세 번째 당김 때 피로를 각각 적었다.

“한 번 가능하다는 것과 매번 같은 조건으로 가능한 건 다르네요.”

내가 말했다.

“그래서 시범 사용을 합니다. 물건이 채워진 양이나 바닥 위치도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제게는 직원 부르는 것보다 빠릅니다.”

“편의도 평가 항목입니다. 다만 반복 동작에서 어깨 통증이 늘면 사용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서진은 당장 사용을 금지할 정도는 아니지만 오늘 오른쪽 어깨로 바퀴를 고정하는 동작은 더 하지 말라고 했다. 거치대 하나를 혼자 쓰기 위해서도 바닥 표시와 고정 홈, 내 어깨 상태가 함께 맞아야 했다.

시설 담당은 병규 쪽을 보았다.

“손병규 씨는 고정 홈과 해제 레버만이라도 오늘 확인하시겠습니까?”

“같이 평가받으려고 나온 것 아닙니다.”

병규가 말했다.

“별도 시간으로 잡겠습니다.”

“내 손 기록은 이미 줬습니다.”

“기록만으로 실제 작동 가능 여부를 확정하지 않겠습니다. 원하지 않으면 다른 대안을 검토하고요.”

병규는 대답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가 거부했으니 내 평가만 끝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면 서명은 더 쉬워졌다.

“제게는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 문장을 말하자 거치대가 내 것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정해진 배부 시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됐고, 직원에게 상자를 내려 달라고 부르지 않아도 됐다. 세탁망 하나를 받는 일에서 질문과 기록이 사라졌다.

시설 담당은 사용 평가서를 내게 건넸다. `도달 가능`, `작동 가능`, `휠체어 회전 가능`, `통증 발생 없음` 칸에 표시가 돼 있었다. 아래에는 `시범 사용 가능`과 `사용 불가` 중 하나를 고르고 서명하는 칸이 있었다.

“제가 사용 가능이라고 하면 그대로 둡니까?”

“일주일 시범 운영 뒤 고정 설치를 검토합니다.”

“손병규 씨 평가는요?”

“오늘 같이 하지 않겠다고 해서 추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먼저 가능이라고 서명하면 그 사람 확인 전에도 운영합니까?”

“최초 요청에 대한 개선 여부는 확인되는 셈입니다. 다른 이용자의 추가 요구는 별도 보완으로 볼 수 있고요.”

그 설명대로라면 거치대는 오늘부터 남았다. 병규가 나중에 사용하지 못해도 내 접근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종결될 수 있었다.

나는 평가서를 무릎 위에 놓았다. `시범 사용 가능` 칸에 표시하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 손으로 당길 수 있었고, 내 휠체어는 돌아 나갈 수 있었다. 병규가 시험을 거부한 것까지 내가 책임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한재호 씨 평가만 먼저 하십시오.”

병규가 방 앞에서 말했다.

“내 건 나중에 내가 할 테니까.”

그 말이 허락인지 불신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시범 사용 가능`에 표시했다. 서명하려다 아래 빈칸을 보았다. `기타 조건`이라고 적힌 좁은 칸이었다.

“여기에 조건을 써도 됩니까?”

“사용하면서 확인할 사항이 있으면 적으세요.”

나는 펜을 들었다.

`휠체어 사용자인 본인에게는 사용 가능. 편측 손 기능 이용자 별도 시험 전 전체 이용자 개선 완료로 종결하지 말 것.`

칸이 좁아 마지막 글자는 선 밖으로 나갔다.

시설 담당이 문장을 읽었다.

“이 조건이면 손병규 씨 평가 전까지 시제품을 열어 둘지 안전 담당과 다시 협의해야 합니다.”

“왜 떼어야 합니까? 저는 쓸 수 있습니다.”

“현재 시제품은 공용으로 설치돼 있습니다. 일부 이용자에게 작동이 어려운데 별도 사용 제한 표시가 없으면, 혼자 시도하다 상자를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관리 방식을 정해야 합니다.”

“제 평가와 병규 씨 평가는 분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분리해서 기록하지만 같은 공용 설비를 씁니다.”

내가 조건을 적으면 내 사용까지 멈출 수 있다는 설명은 서명 전에 듣지 못했다. 나는 평가서를 다시 달라고 할 뻔했다. 조건을 지우고 `내게 가능`만 남기면 거치대는 오늘 그대로 있을 수도 있었다.

“수정하시겠습니까?”

시설 담당이 물었다.

“조건 문장을 지우면 됩니까?”

“본인 평가만 확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이용자 위험을 인지하셨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했으니 담당 검토는 진행해야 합니다.”

지워도 완전히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내가 레버 동작을 보며 병규에게 어려울 수 있다고 물은 순간, 정보는 시설 담당에게도 생겼다.

“그대로 두겠습니다.”

나는 평가서에 서명했다.

시설 담당은 시제품 아래에 `사용 중지, 추가 평가 예정` 표지를 붙였다. 공구를 가져온 직원이 벽 고정 나사를 풀었다. 설치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철제 판이 다시 접혀 운반 상자에 들어갔다.

병규는 문 앞에서 그 장면을 보았다.

“내가 못 쓴다고 한 적 없는데요.”

“못 쓴다고 쓴 게 아닙니다. 별도 시험이 필요하다고 썼습니다.”

“그래서 한재호 씨도 못 쓰게 됐네요.”

“그렇습니다.”

“나한테 보여 주려고 그런 겁니까?”

“제 평가로 병규 씨 문제까지 끝난 걸로 하지 말라고 쓴 겁니다.”

병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맙다고 하지도 않았다.

그날 저녁 세탁망이 하나 더 필요해졌다. 환자복을 갈아입으며 물을 조금 흘려 젖은 옷을 따로 담아야 했다. 정해진 배부 시간은 이미 끝나 있었다.

나는 벽 반대편을 보았다. 시제품이 있던 자리에는 나사 구멍 네 개만 남아 있었다.

호출벨을 누르고 근무자를 기다렸다.

다른 방 투약 중이라 십이 분 뒤에야 도윤이 왔다. 그는 높은 선반에서 상자를 내려 내게 망을 하나 건넸다.

“시제품은 언제 다시 옵니까?”

“손병규 씨 평가와 해제 방식 개조를 검토한 뒤 결정합니다. 날짜는 아직 없습니다.”

“그동안은 계속 불러야 합니까?”

“배부 시간 밖에는 그렇습니다.”

도윤은 상자를 다시 올렸다. 내가 쓴 조건 문장은 시설 기록에 남고, 거치대는 벽에서 사라졌다.

다음 날 게시판의 처리 상태는 `사용 가능`이 아니었다.

`조건부 재검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