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33 / 50
세탁망 배부함은 옮겨지지 않았다.
대신 게시판에 배부 시간이 붙었다. 오전 세면 뒤 십 분, 저녁 식사 전 십 분 동안 직원이 상자를 내려 탁자 위에 두기로 했다는 안내였다. 그 시간에 받지 못한 사람은 근무자에게 따로 요청하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휠체어에서 팔을 들지 않고 세탁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손병규는 안내문을 읽고 종이를 손등으로 쳤다.
“이건 전보다 더 불편하잖아.”
“정해진 시간에 내려 준답니다.”
“내가 그 시간에 처치 들어가면? 저녁에 세탁물 생기면 다음 날까지 기다려?”
“직원에게 따로 요청할 수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 부탁을 안 하려고 옮겨 달라고 한 거잖아.”
병규는 왼손을 폈다. 굳은 두 손가락은 나머지 손가락만큼 펴지지 않았다.
“한 손으로 상자 잡고 망 하나 빼는 게 어렵다고 말했어요?”
“다른 수용자도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내 이름은?”
“본인이 직접 요청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재호 씨가 말을 제대로 안 한 거네.”
그 말에 나는 화가 났다.
“제 이름으로 해 달라고 한 건 병규 씨입니다. 제가 겪지도 않은 일을 대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 세탁물은 받아 갔으면서.”
“건의한다고 했고 실제로 했습니다.”
“한재호 씨한테만 편해졌잖아.”
나는 안내문을 다시 보았다. 내 요청은 처리 완료로 표시돼 있었다. 손이 닿지 않는다는 문제에 직원 배부라는 답이 생겼기 때문이다.
“제게 안 닿던 건 사실입니다.”
“내가 불편하다고 먼저 말했잖아.”
병규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배부 시간에 직원이 상자를 탁자 위에 내렸다. 나는 망 하나를 골라 무릎 위에 놓았다. 병규는 오지 않았다. 처치 중인지, 일부러 받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십 분 뒤 상자는 다시 높은 선반으로 올라갔다.
배부 시간이 끝난 지 한 시간이 지나 병규가 젖은 수건을 들고 나왔다. 그는 선반 아래에서 직원을 기다렸다. 근무자는 다른 방의 투약 확인 중이었다.
“제 집게로 상자 가장자리를 당겨 볼까요?”
내가 물었다.
“또 식판 가져다 달라고 하려고요?”
“그 말이 아닙니다.”
“집게로 당기다 떨어뜨리면 누가 책임집니까.”
병규는 내게 전날 도윤이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직원이 돌아와 상자를 내려 줄 때까지 그는 젖은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요청하는 데 걸린 시간은 몇 분뿐이었다. 그러나 병규는 직원이 올 때마다 자기 손가락을 보여 주고 왜 혼자 꺼내기 어려운지 말해야 했다.
“직접 시설 요청을 하십시오.”
내가 말했다.
“또 손 검사받고 사용 동작 보여 주라고 하겠지.”
“그래야 기록에 들어간답니다.”
“내 손이 얼마나 굽는지 사람들 앞에서 매번 보여 주는 게 쉬워 보여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병규는 젖은 수건을 세탁망에 넣었다. 오른손으로 망 입구를 벌리는 동안 왼손으로 수건을 밀어 넣으려 했지만 두 손가락이 천을 놓쳤다. 그는 망을 탁자에 눕히고 오른손만으로 수건을 넣었다.
“처음 여기 왔을 때 식판도 한 손으로 못 드냐고 웃은 놈들이 있었어요. 그 뒤로는 직원 앞에서만 말합니다. 그런데 직원도 바뀔 때마다 처음부터 물어봐요.”
“면담 시간을 따로 잡을 수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또 한재호 씨가요?”
그가 쏘아보았다.
“시간만 확인하겠습니다. 요청 내용은 병규 씨가 말하고요.”
“내가 말 못 하는 사람입니까?”
“제가 대신 말해서 이렇게 됐잖습니까.”
병규는 망의 끈을 묶었다. 굳은 손가락으로 고리를 잡지 못해 이를 한 번 사용했다.
“직원 없는 데서 먼저 설명하게 해 줘요. 여러 사람 지나가는 복도 말고.”
“그렇게 물어보겠습니다.”
나는 나도윤에게 비공개로 시설 요청을 설명할 면담이 가능한지 물었다. 그는 요청자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손병규 씨입니다. 본인이 직접 말할 겁니다.”
“손병규 씨가 면담을 요청했습니까?”
“사람들 없는 자리에서 먼저 설명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본인에게 확인하겠습니다.”
도윤은 바로 병규를 부르지 않았다. 저녁 점검이 끝난 뒤 병규 방 앞에서 의사를 다시 물었다. 병규는 잠시 나를 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공용공간이 아닌 곳에서 시설 담당에게 설명하고 싶습니다.”
도윤은 다음 날 오후 작은 상담실을 예약했다. 요청자 칸에는 손병규의 이름이 들어갔다. 내 이름은 동행 여부 칸에만 적혔다.
“왜 동행합니까?”
내가 물었다.
“손병규 씨가 처음 요청 과정을 같이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원하지 않으면 빠질 수 있습니다.”
병규가 말했다.
“처음에 한재호 씨 이름으로 들어간 이유는 같이 말해야 하잖아요.”
그 말은 세탁물 운반과 건의가 교환이었다는 사실도 설명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다음 날 상담실에는 시설 담당 직원과 도윤, 병규와 내가 앉았다. 병규는 출입문에서 가장 먼 의자를 골랐다. 시설 담당은 먼저 면담 목적과 기록 범위를 설명했다.
“세탁망 배부함 사용과 관련해 손병규 씨 본인의 어려움을 듣겠습니다. 한재호 씨는 기존 요청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동행한 것으로 기록합니다.”
병규는 굳은 왼손을 무릎 아래에 숨겼다.
“현재 배부 시간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점이 무엇입니까?”
시설 담당이 물었다.
병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배부 시간에 처치가 겹치는 경우가 있습니까?”
“가끔요.”
“그 외 시간에는 근무자에게 요청할 수 있습니다.”
“압니다.”
“그 방식이 어려운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병규는 나를 보았다. 대신 말해 달라는 눈이었다.
나는 시설 담당에게 시선을 옮겼다. 병규가 상자를 쏟을 뻔한 일과 굳은 손가락, 사람들 앞에서 설명하기 싫다는 말을 모두 알고 있었다. 내가 말하면 면담은 빨리 끝날 수 있었다.
“처음 요청은 제가 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손병규 씨가 제 세탁물을 대신 가져다주는 조건으로, 제가 제 이름을 써서 건의했습니다.”
도윤이 기록 화면을 확인했다. 병규의 얼굴이 굳었다.
“그때 저는 제 휠체어에서 닿지 않는다는 사실만 말했습니다. 손병규 씨가 왜 어려운지는 제가 대신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시설 담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 요청 경위는 확인했습니다. 이제 손병규 씨의 필요는 본인에게 듣겠습니다.”
병규가 다시 나를 보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채우지 않는 동안 면담실 시계 초침 소리가 커졌다.
병규는 감춰 둔 왼손을 무릎 위로 올렸다.
“상자를 잡고 망을 빼려면 두 손이 필요합니다.”
그가 말했다.
시설 담당은 바로 손을 만지지 않았다.
“어떤 동작에서 어려운지 직접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원하지 않으면 말로만 설명해도 됩니다.”
병규는 탁자 위에 놓인 빈 서류 상자를 왼손으로 고정하고 오른손으로 종이 한 장을 빼 보았다. 굳은 두 손가락이 상자 옆면에서 미끄러졌다. 상자가 탁자 끝으로 밀렸다.
“세탁망 상자는 더 높고 안에 든 게 서로 걸립니다. 한 장만 안 빠지면 상자째 앞으로 옵니다.”
“낮은 탁자에서는 지금 동작이 가능합니까?”
“눕혀 놓으면 오른손으로 입구를 벌리고 꺼낼 수 있습니다.”
“정해진 배부 시간 방식은요?”
“그 시간에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처치나 접견이 겹칠 때마다 직원에게 내 손 얘기를 해야 합니다. 근무자 바뀌면 왜 미리 못 받았냐고 다시 묻고요.”
병규의 설명에는 내가 넣을 문장이 없었다. 그는 배부함을 무조건 아래로 옮겨 달라고 하지 않았다. 낮은 곳에 상자를 눕혀 두거나, 하루 사용할 망을 미리 개별 지급하는 방법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시설 담당은 세 가지 방법을 적었다. 현재 배부 시간 유지와 개별 예비망 지급, 벽 반대편의 얕은 당김식 거치대 설치였다. 낮은 거치대는 휠체어 회전 폭과 전기 덮개를 피할 수 있는 규격을 다시 재야 했다.
“한재호 씨에게도 당김식 거치대가 필요합니까?”
그가 내게 물었다.
나는 병규가 설명한 방법 중 무엇이 더 좋은지 말하고 싶었다. 내 휠체어를 근거로 설치를 밀어붙이면 결정이 빨라질 수도 있었다.
“제 경우에는 직원 배부 시간으로 접근 문제는 해결됐습니다. 시간 밖에 필요할 때는 직원을 부를 수 있습니다.”
“당김식 거치대를 설치하면 직접 사용하는 선택지도 생깁니다.”
“회전 공간을 실제로 확인한 뒤 선택하겠습니다.”
시설 담당은 내 대답과 병규의 요청을 다른 줄에 적었다. 하나의 `접근 불편`이 두 사람의 서로 다른 필요로 나뉘었다.
“손 기능 확인을 의료동 기록과 연계해도 되겠습니까?”
그가 병규에게 물었다.
병규는 손을 다시 무릎 아래로 내리려다 멈췄다.
“이 시설 요청에 필요한 범위만요.”
“그 범위로 동의 여부를 기록하겠습니다.”
면담이 끝난 뒤 병규는 복도에서 내 앞을 막았다.
“세탁물 얘기까지 꼭 했어야 했어요?”
“처음 요청이 왜 제 이름으로 들어갔는지 묻는 자리였습니다.”
“그냥 대신 말해 줬다고 하면 됐잖아.”
“대신 말해 준 대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물건으로 매수한 사람처럼 됐네요.”
“저도 제 이름을 빌려준 사람으로 기록됐습니다.”
병규는 비켜섰다.
“다음에는 부탁 안 합니다.”
그가 먼저 돌아갔다. 내가 침묵을 대신 채우지 않은 일은 병규의 말을 남겼지만, 우리 사이를 좋게 만들지는 않았다.
저녁에 새 면담 기록 요약이 도착했다. `한재호: 휠체어 도달 높이`, `손병규: 편측 손 기능과 반복 설명 부담`이 서로 다른 항목에 적혀 있었다.
처음 시설 접수표에 있던 내 이름 하나가 두 이름으로 나뉘었다.
그 아래 해결 방법은 아직 `검토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