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건너는 해
손이 닿는 자리

에피소드 26 / 50

배성환이 다시 팔을 뻗었다.

손끝이 컵 손잡이 안쪽에 걸렸다. 그는 손목을 조금 비틀어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았다. 컵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돼요.”

정호가 손을 거두었다. 나는 배성환이 고맙다는 말을 덧붙일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 그가 한 일은 손잡이를 돌려 준 것뿐이었고,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오전에 서명한 종이가 어디에도 표시되지 않은 채 사라진 뒤라, 방금의 작은 장면에서 무언가를 돌려받고 싶었던 것 같았다.

배성환은 컵 대신 무릎 위의 담요 끝을 만졌다.

“호출벨은 어디 있어요?”

윤서진이 침대 옆 이동식 탁자 아래를 확인했다. 직원들이 방을 비우며 산소장치와 함께 가져온 호출벨 선이 담요 뒤로 넘어가 있었다.

“제가 꺼낼게요.”

나는 배성환 쪽으로 바퀴를 한 번 밀었다.

“그대로 계세요.”

서진이 말했다.

그녀는 먼저 산소장치 전원선이 내 앞바퀴와 닿는지 보았다. 선은 벽을 따라 고정돼 있었지만 호출벨 선이 그 위를 비스듬히 지나고 있었다. 내가 더 가까이 가면 발판 아래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호출벨 선은 제가 정리합니다. 한재호 씨는 컵이 넘어지지 않게 탁자 반대쪽만 잡아 주세요.”

나는 탁자 모서리를 잡았다. 서진이 담요를 들고 선을 빼냈다. 호출벨은 검은 고무줄로 침대 난간에 묶여 있었는데, 지금은 침대가 아니라 휠체어 옆에 있어 묶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오른손으로 누르십니까?”

서진이 물었다.

“왼손이요. 오른손은 오래 들면 떨려요.”

“여기 붙이면 닿으세요?”

서진은 이동식 탁자 왼쪽 가장자리에 임시 고정대를 붙였다. 배성환이 팔을 뻗었다. 손끝이 버튼 위를 스쳤지만 누르지는 못했다.

“조금 아래요.”

고정대를 손가락 한 마디만큼 내렸다. 이번에는 배성환의 엄지가 버튼 가운데에 닿았다.

“눌러 보세요.”

짧은 호출음이 복도에서 울렸다. 나도윤이 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험입니다.”

서진이 말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호출 표시를 껐다.

배성환은 손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탁자와 컵과 호출벨이 모두 자리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십 분 뒤 저녁 식판이 왔다.

식판을 놓으려면 컵을 옮겨야 했다. 정호가 컵을 창틀에 두려 하자 배성환이 고개를 저었다.

“거긴 잊어버려요.”

“식사할 동안만 두면 되잖아.”

“내가 잊는다고요.”

정호의 손이 멈췄다. 그는 컵을 들고 배성환을 보았다.

“어디다 둘까요?”

“식판 오른쪽 뒤요. 국에는 안 닿게.”

정호가 컵을 놓았다. 식판 오른쪽 뒤에는 수저통과 약봉지가 있어서 자리가 좁았다. 컵을 너무 뒤로 밀면 배성환의 팔이 닿지 않았고, 앞으로 놓으면 팔꿈치가 국그릇에 걸렸다.

“제가 식판을 왼쪽으로 옮기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배성환은 식판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둬요. 먹다가 말할게요.”

나는 탁자에서 손을 뗐다. 내가 보기에는 왼쪽으로 몇 센티미터만 옮기면 되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아직 하지 말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배성환은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국에 적셨다. 두 숟갈을 먹은 뒤 기침했다. 서진이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들고 왔다. 측정하는 동안 식판을 조금 앞으로 당겨야 했고, 컵은 다시 뒤로 밀렸다.

“숨은 어떠세요?”

“평소랑 비슷해요.”

“기침은요?”

“밥 먹으면 원래 그래요.”

서진은 수치를 확인하고 호흡음을 들었다. 산소 유량을 임의로 바꾸지 말라고 다시 말한 뒤, 기침이 심해지거나 가슴이 답답하면 호출벨을 누르라고 했다. 나는 옆에서 배성환의 얼굴색을 살폈다. 숫자를 볼 수 없으면서도 심각한 표정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재호 씨.”

서진이 나를 불렀다.

“네.”

“식판 오른쪽이 막혔습니다. 배성환 씨한테 컵을 어디로 옮길지 물어봐 주세요. 저는 기기 정리할게요.”

그것은 내가 해도 되는 일이었다.

“컵을 어디에 놓을까요?”

“아까 자리요.”

나는 컵을 들었다. 아까 자리가 식사 전의 자리인지, 식판 오른쪽 뒤인지 알 수 없었다.

“손잡이를 돌렸던 자리 말입니까, 식판 뒤 말입니까?”

“손잡이 돌렸던 데요.”

식판 때문에 그 자리는 절반쯤 가려져 있었다. 나는 식판을 건드리지 않고 컵을 놓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지점을 골랐다.

배성환이 손을 뻗었다.

“조금 더 뒤.”

컵을 밀었다.

“너무 갔어요.”

다시 당겼다.

“거기.”

나는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렸다. 배성환이 컵을 잡아 한 모금 마셨다. 이번에는 고맙다는 말을 했다.

“고마워요.”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기다렸던 말이었는데, 듣고 나니 내가 한 일이 실제보다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어보고 옮긴 것뿐입니다.”

내 말은 겸손처럼 들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 말까지 잘했다고 세고 있었다.

배성환은 식사를 계속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컵을 옮겼는지는 그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컵이 닿는 자리에 있는지가 그에게 필요한 전부였다.

식사가 끝난 뒤 직원이 식판을 걷어 갔다. 이동식 탁자 위에는 다시 넓은 자리가 생겼다. 배성환은 호출벨을 찾으려고 왼손을 들었다. 식판을 놓고 빼는 동안 고정대가 위로 밀려 있었다. 엄지가 버튼 아래에 닿았다.

“이것도 또 옮겨야겠네요.”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임시로 묶어 놓으면 계속 그래요.”

배성환의 목소리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제가 잡아 드릴까요?”

“잡고 있으면 한재호 씨가 밤새 여기 있을 겁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서진이 새 고정대를 가져왔다. 그는 배성환에게 휠체어 팔걸이 바깥쪽과 탁자 가장자리 두 곳을 보여주었다. 팔걸이에 붙이면 이동할 때 선이 따라가지만 옷소매에 걸릴 수 있었고, 탁자에 붙이면 식사 때마다 위치가 바뀔 수 있었다.

“팔걸이요.”

배성환이 말했다.

“소매 걸리는지 먼저 볼게요.”

서진이 선의 여유 길이를 재고 고정대를 붙였다. 배성환이 팔을 앞뒤로 움직였다. 소매는 걸리지 않았다. 호출벨 시험을 한 번 더 하자 도윤이 다시 문 앞에 나타났다.

“또 시험입니까?”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랍니다.”

서진이 말했다.

배성환은 웃지 않았다.

“방에 돌아가면 또 바꿔야죠.”

맞는 말이었다. 콘센트 수리가 끝나면 침대 높이와 탁자 방향이 달라졌다. 공용공간에서 맞춘 자리는 그 방에서는 맞지 않을 수 있었다.

저녁 점검 직전, 맞은편 방의 수리가 끝났다. 직원 둘이 배성환의 이동을 도왔다. 서진은 산소장치 전원을 이동용 배터리로 바꾸고, 선이 바퀴와 발판에 닿지 않는지 확인했다. 나는 통로를 비키려고 뒤로 물러났다.

“컵은 제가 가져갈까요?”

내가 물었다.

배성환이 컵을 보았다.

“뚜껑 닫아 주세요. 가져가는 건 직원이 할 거예요.”

나는 뚜껑을 닫았다. 손잡이 방향을 어디로 둘지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이동하는 동안에는 직원이 컵을 들었고, 방에 도착한 다음 자리를 다시 정해야 했다.

배성환이 돌아간 뒤 우리 방 앞에는 고정대를 떼어 낸 자국과 탁자 다리가 눌렀던 선만 남았다. 정호는 성경을 펴기 전에 손 소독제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 자리는 조금 전까지 컵이 있던 곳이었다.

“사람마다 손 닿는 데가 다르네.”

정호가 말했다.

“같은 사람도 계속 달라집니다.”

내가 대답했다.

말하고 나서 그것을 깨달음처럼 기억하려는 마음이 생겼다. 나는 오늘 배운 문장을 머릿속에 남겨 두고 싶었다. 나중에 자기성찰서에 쓸 수 있는 문장처럼 반듯했다.

서진이 빈 이동식 탁자를 밀고 나가다 나를 보았다.

“한재호 씨, 오른쪽 어깨는 어떠세요?”

“무겁습니다.”

“오후에 많이 밀었으니까 냉찜질하고, 오늘은 바닥 물건 줍는 동작 하지 마세요.”

“배성환 씨 방은 괜찮습니까?”

“지금 확인 중입니다.”

“제가 가서 컵 자리라도—”

“직원이 하고 있어요. 한재호 씨는 치료 대상이지 근무자가 아닙니다.”

서진은 말끝을 부드럽게 만들지 않았다.

나는 침대로 옮겨 앉은 뒤 냉찜질 주머니를 어깨에 댔다. 오늘 내가 한 일을 세어 보았다. 탁자를 한 번 잡았고, 컵을 몇 번 옮겼고, 뚜껑을 닫았다. 호출벨 선과 산소장치는 서진이 다뤘다. 배성환은 필요한 자리를 스스로 말했다. 내가 없어도 다른 사람이 물어보고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 사실이 서운했다.

서운하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나는 그것을 책임감이라고 바꿔 부르려 했다. 배성환의 상태를 걱정한다고 생각하면 내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걱정은 그의 방으로 가고 싶은 내 욕구를 자동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배식 전에 배성환이 우리 방 앞을 지나갔다. 정기 흉부 촬영을 위해 검사실로 가는 길이었다. 이동식 산소장치는 휠체어 뒤에 고정돼 있었고 호출벨은 없었다. 직원이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배성환이 나를 보고 말했다.

“어제 컵, 방에서는 침대 왼쪽에 뒀어요.”

“거기가 더 편했습니까?”

“밤에는요. 아침에는 탁자 옮기니까 또 바꿔야 해요.”

그는 지나갔다. 직원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아침 식판이 들어오고 정호가 내 물컵을 창가 쪽으로 밀었다. 반찬 그릇을 놓을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나는 컵을 다시 당기려다 오른쪽 어깨의 냉기를 기억했다.

“정호 형.”

“왜.”

“컵을 제 왼손 앞에 놓아 주세요. 손잡이는 바깥쪽으로요.”

정호가 컵을 옮겼다. 한 번에 맞지 않았다. 너무 가까워 손목을 꺾어야 했다.

“조금만 뒤로요.”

그가 다시 밀었다.

나는 손을 뻗어 닿는지 확인했다.

아무도 그 일을 기록하지 않았다.

점심이 오면 컵은 또 옮겨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