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25 / 50
회사 공동제출 동의서의 서명란은 왼쪽에 있었다.
전체자료 제공 일정 확인서의 서명란은 오른쪽에 있었다.
서준호는 두 장을 같은 높이로 놓았다. 어느 쪽도 내 앞으로 더 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오늘은 7월 8일이었다. 가석방 보완자료와 박미영 측 자료제공 회신의 마감일. 오전 접견이 끝나면 서준호는 사무실로 돌아가 오후 다섯 시 전까지 한쪽 문서를 보내야 했다.
“회사안에 동의하면 초기계측 원본, 최종보고 수정 이력, 장석호 메일을 오늘 독립 검토기관에 공동 제출합니다. 녹음과 개인 메일은 보호범위 협의 후 제출하고요.”
“가석방 자료에는 회사 책임이 확인됐다고 쓸 수 있고.”
“추가 정황이 공식 검토에 들어갔다고 쓸 수 있습니다.”
“제 승인 녹음은 아직 안 들어가고요.”
“기존 판결에 승인 사실은 이미 있습니다. 새 음성자료가 오늘 제출되지는 않습니다.”
서준호는 오른쪽 문서를 가리켰다.
“전체자료 일정안에 서명하면 관련자료를 선별하되 유불리를 기준으로 빼지 않습니다. 회사 압박 메일, 초기계측, 한재호 씨 회신, 사고 전날과 당일 녹음, 사고보고서 수정 이력을 한 묶음으로 보냅니다. 개인정보 비식별과 보호약정 때문에 완료까지 최소 이 주가 걸립니다.”
“오늘은 일정만 보냅니까?”
“네. 제공 범위와 1차 전달일을 확약합니다.”
“심사자료에는 완료로 못 쓰고요.”
“못 씁니다.”
나는 회사 요약문을 다시 읽었다.
당시 경영진의 준공일정 관리 요구와 현장 보고체계의 한계가 개별 관리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 정황을 추가 확인함.
틀리지 않았다.
장석호의 압박은 있었다. 기준 초과값은 최종 보고에서 빠졌다. 외부 점검이 오지 않았는데도 비용과 일정을 이유로 현장 판단을 요구받았다.
개별 관리자라는 말 안에는 내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없었다.
“회사 요약문 뒤에 제 회신 내용만 붙이면 안 됩니까?”
내가 물었다.
“어떤 회신을요?”
“재측정값 기준으로 정리하라고 한 것. 녹음은 나중에 보내고요.”
“왜 그렇게 나눕니까?”
“메일은 문서라 비식별 문제가 적잖습니까.”
“법률상 가능할 수는 있습니다.”
서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박미영 씨 쪽 요청은 작업자들이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회사 문구를 검토하기 위한 겁니다. 박진수 씨와 최민석 씨가 작업 연기를 요구한 녹음이 핵심일 수 있습니다.”
“제 승인 음성도 같이 있고요.”
“네.”
내가 원하는 부분만 먼저 내는 것은 회사안과 닮아 있었다. 회사는 압박과 원자료 누락을 인정하면서 개인 승인 음성을 늦추려 했다. 나는 회신까지 내겠다고 양보하면서 녹음은 뒤로 보내려 했다.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순서를 골랐다.
순서는 결론을 미리 만들 수 있었다.
“전체자료 일정안으로 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서준호는 바로 펜을 건네지 않았다.
“결과를 이해하셨습니까?”
“가석방 자료 마감 전에 제공 완료가 안 됩니다.”
“새 자료 때문에 심사 담당자가 책임 인식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추천 검토 일정에 포함되지 못할 가능성도 있고요.”
“회사 책임 자료도 같이 갑니다.”
“같이 갑니다.”
“그럼 무조건 불리한 건 아니잖습니까.”
나는 아직 보상을 계산했다.
서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불리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받을 수 있는 유리한 확인을 포기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전체 검토를 택하는 겁니다.”
그제야 펜을 건넸다.
나는 오른쪽 문서에 서명했다.
책상 높이 때문에 손목이 꺾였다. 이번에는 `호`의 마지막 획이 길게 미끄러졌다. 한 번 그어진 선은 서명란 아래까지 내려갔다.
“다시 써야 합니까?”
“본인 서명으로 확인되면 괜찮습니다.”
서준호는 시각을 적었다.
7월 8일 오전 10시 42분.
그는 왼쪽 회사 동의서에 `미동의`라고 표시했다. 폐기하지 않고 사건기록에 넣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문서도 남았다.
“박미영 씨 측에 제 사유를 전달합니까?”
“자료 범위와 일정만 보냅니다.”
“가석방에 불리할 수 있는데도 동의했다고는—”
나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전달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합니다.”
“회사 쪽에는요?”
“공동제출안에 동의하지 않았고, 관련자료 전체를 보호절차에 따라 제공하겠다고 통지합니다.”
“회사에서 소송 걸 수 있습니까?”
“소유권과 비밀정보 범위를 다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본 전체를 무제한 공개하지 않고 독립 검토와 비식별 절차를 유지하는 겁니다.”
“그 다툼 때문에 이 주보다 늦어지면요?”
“법원 보전이나 제출명령 절차를 검토합니다.”
선택했다고 해서 결과를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정에 서명했지만 회사가 다투면 늦어질 수 있었다. 박미영이 실제로 자료를 받았는지 통지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게 확실히 남은 것은 회사 요약문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오후에는 서기현과 다시 면담했다. 그는 내가 가져온 제공 일정 확인서를 읽고 보완자료 기록안을 수정했다.
사고 관련 원자료 제공 동의 및 보호절차 진행 중.
추가자료 검토 미완료.
책임 인식 및 사실관계 보완 필요.
“`피해 회복을 위한 자료 제공`이라고 쓰면 안 됩니까?”
내가 물었다.
“자료가 아직 전달되지 않았고, 상대가 이것을 피해 회복이라고 평가한 적도 없습니다.”
“제가 그 목적이라고 썼잖습니까.”
“한재호 씨 목적과 상대 결과는 다릅니다.”
“그러면 `피해 회복 관련` 정도는요?”
“사고기록 정정 요구와 관련된 자료 제공이라고는 쓸 수 있습니다.”
그는 문장을 바꿨다.
사고기록 정정 요구 관련 원자료 제공 동의 및 보호절차 진행 중.
여전히 제공 완료도, 협조 평가도 없었다.
“이번 추천 검토에는 어떻게 됩니까?”
서기현은 심사 일정표를 확인했다.
“보완자료 검토회의가 사흘 뒤입니다. 그때까지 전체자료 내용이 확인되지 않으면 책임 인식 평가를 확정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추천에서 빠집니까?”
“이번 회의에서 보류되면 다음 검토 순서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얼마나 늦어집니까?”
“확정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자료를 공개하겠다고 했는데 왜 불이익을 받습니까?”
목소리가 커졌다.
서기현은 문을 보지 않았다. 나도윤이 벽 쪽에서 기록하고 있었다.
“공개 동의에 대한 벌이 아닙니다.”
“결과는 같잖습니까.”
“새 자료가 기존 자기성찰서와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심사에서 유리한 부분만 먼저 볼 수는 없습니다.”
“회사안을 받았으면 오늘 확인됐을 겁니다.”
“회사안이 어떤지는 제가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럼 제가 손해를 봤는지도 판단하지 않겠네요.”
“일정상 늦어질 가능성은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회사 동의서에 다시 서명하고 싶었다. 아직 서준호가 발송하기 전일 수도 있었다. 전화 신청을 하면 접견 뒤 연락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 생각은 서명 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왔다.
내 선택이 옳다는 확신보다 대가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제공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법률적으로는 변호사에게 문의하셔야 합니다.”
서기현이 대답했다.
“철회하면 심사에는 어떻게 적습니까?”
그 질문을 하고 나서 내가 무엇을 재고 있는지 분명해졌다.
자료를 주는 일보다 철회 기록이 얼마나 불리할지를 먼저 물었다.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서기현은 그 말을 칭찬하지 않았다. 기록지에 추가하지도 않았다.
의료동으로 돌아가는 동안 오른쪽 어깨가 무거웠다. 오전과 오후에 교육동을 두 번 오가느라 바퀴를 많이 밀었다. 두 번째 경사로에서는 나도윤에게 방까지 밀어달라고 요청했다.
방 앞에는 배성환의 휠체어가 서 있었다. 예전 종교상담 뒤 기침하던 장기질환 수용자였다. 산소통은 작은 이동식 장치로 바뀌어 있었고 투명한 줄이 콧등을 지나 귀 뒤로 이어졌다.
“왜 여기 계십니까?”
내가 물었다.
“우리 방 콘센트 점검한대.”
배성환이 말했다.
의료동 직원들이 맞은편 방의 낡은 콘센트를 교체하는 동안 그를 우리 방 앞 공용공간으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윤서진은 산소장치 전원선이 통로를 가로지르지 않도록 벽 쪽에 고정하고 있었다.
정호가 배성환의 물컵을 자기 탁자에 올려두었다.
“거긴 손이 안 닿아요.”
배성환이 말했다.
정호는 컵을 가까이 옮겼다. 이번에는 너무 가까워 휠체어 팔걸이에 걸렸다.
“조금만 뒤로요.”
서진이 컵을 손 하나 들어갈 만큼 옮겼다.
배성환이 팔을 뻗어 직접 닿는지 확인했다.
“여기면 됩니다.”
누구도 나의 오전 서명을 몰랐다.
컵은 너무 멀어도 안 됐고 너무 가까워도 안 됐다.
그 거리는 한 번 맞춘 뒤에도 물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을 때마다 달라질 수 있었다.
배성환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다시 놓았다.
컵은 방금 정한 자리에서 손가락 두 마디만큼 벗어났다.
정호가 손을 내밀다가 멈췄다. 배성환이 먼저 컵을 당겨 보았고, 바닥이 탁자 위를 짧게 긁었다. 이번에는 손잡이가 벽 쪽을 향했다.
“손잡이만 이쪽으로 돌려 주세요.”
정호는 컵을 들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반 바퀴 돌렸다. 배성환은 다시 닿는 거리를 확인했다.
그는 다시 팔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