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건너는 해
한 번만 묻는 연락

에피소드 23 / 50

서기현은 참여 목적 칸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종이에 쓴 답부터 읽지 않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왜 신청하려는지 먼저 말씀해보세요.”

나는 교육실의 낮은 책상 앞에 휠체어를 붙이고 있었다. 책상 아래 가로대 때문에 발판이 끝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무릎과 종이 사이가 멀었다. 서기현은 책상을 바꾸자고 했지만, 나는 면담 시간이 짧아진다며 그대로 하겠다고 했다.

“사고에 대한 책임을 정확히 확인하고 피해 회복을 위해 가능한 일을 찾으려고 합니다.”

준비한 문장이었다.

서기현은 손을 떼지 않았다.

“누구에게 무엇을 확인받고 싶습니까?”

“확인받고 싶은 건 아닙니다.”

“그러면 이 프로그램이 왜 필요하죠?”

“박미영 씨가 원자료 공개와 사고기록 정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요구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자료 제공은 변호사를 통해 진행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충분한지 누가 결정합니까?”

질문이 계속 같은 곳을 찔렀다.

나는 박미영에게 회사의 압박과 원자료 누락을 설명하고 싶었다. 내가 외장하드를 숨기지 않았고, 전체 녹음 제공에 동의했다는 사실도 알리고 싶었다. 그 말을 들으면 박미영이 나를 용서하지 않더라도 회사와 같은 편으로만 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빠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 말은 본인 기준입니다.”

“피해자 기준을 알아보는 게 이 프로그램 아닙니까?”

“일부는 맞습니다.”

서기현은 안내문을 폈다.

회복적 대화 프로그램은 수형자와 피해자가 만나 화해하는 행사가 아니었다. 독립 담당자가 양측 의사를 따로 확인하고, 직접 대화, 서면 전달, 사실확인, 배상계획 검토, 아무것도 하지 않기 중 원하는 범위를 정하는 절차라고 했다.

피해자에게는 한 차례만 연락했다.

거부하면 다시 묻지 않았다.

답하지 않아도 거부와 같은 효력이 있었다.

수형자에게는 피해자의 연락처를 주지 않았다.

피해자가 이유를 밝히지 않으면 담당자도 이유를 전달하지 않았다.

“상대가 참여하지 않아도 신청 사실은 심사자료에 남습니까?”

내가 물었다.

서기현은 나를 보았다.

“사전면담과 교육에 참여한 사실은 남을 수 있습니다.”

“피해 회복 노력으로요?”

“자동으로 그렇게 평가되지는 않습니다. 신청 목적과 이후 행동을 함께 봅니다.”

“상대가 거부하면 제가 할 수 있는 이후 행동이 없잖습니까.”

“직접 접촉하지 않는 행동이 남습니다.”

그 대답은 심사자료 한 칸을 채워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노력으로 적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프로그램을 신청하지 않아도 자료는 제공할 수 있습니다.”

서기현이 말했다.

“그럼 신청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까?”

“제가 판단하지 않습니다. 한재호 씨가 피해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나는 그 질문을 생각했다.

나를 만나고 싶은가.

사과를 듣고 싶은가.

자료를 받았는가.

회사와 내 책임을 어떻게 보는가.

내가 변했다고 생각하는가.

마지막 질문이 가장 숨기고 싶은 것이었다.

“자료만 받기를 원하는지 물을 수 있습니까?”

“가능합니다.”

“직접 대화나 답장은 요구하지 않고요.”

“그 조건을 신청서에 적을 수 있습니다.”

“자료를 받은 뒤 제게 반응을 전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도 적을 수 있고요.”

“그러면 제가 자료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확인합니까?”

서기현은 손바닥 아래 가려둔 목적 칸을 보았다.

“자료 전달 여부는 절차기록에 남습니다. 상대의 평가가 아니라 전달 사실만요.”

내가 원한 문장이었다.

가석방 심사자료에는 협조와 제공이라는 행동이 남고, 박미영에게 답을 요구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가장 균형 잡힌 선택처럼 보였다.

나는 그 균형이 마음에 드는 이유를 경계했다.

“프로그램 안내 연락을 받는 것 자체가 부담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독립 담당자가 기존 대리인을 통해 한 번만 확인합니다. 피해자 본인에게 직접 전화하거나 집으로 찾아가지 않습니다.”

“박미영 씨 대리인은 이미 원자료를 요청했습니다.”

“그 요청이 회복적 대화 참여 의사는 아닙니다.”

“자료 제공만 확인하는 것도 참여입니까?”

“프로그램 안에서 할 수도 있고, 기존 법률절차로만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박미영 씨 쪽에 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했는지 저한테 알려줍니까?”

“프로그램 진행 여부만 알립니다. 자료를 받은 이유나 감정, 요구하지 않은 답변은 전달하지 않습니다.”

나는 원하던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분리하려 했다.

원자료는 전달되어야 했다.

사고기록은 고쳐져야 했다.

박미영의 답은 요구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자료를 받았다는 사실은 알고 싶었다.

그 사실이 내게 돌아오면 전달은 다시 나를 위한 결과가 될 수 있었다.

“제가 모르게 전달할 수도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본인이 제공 동의를 철회하지 않는 한, 전달 결과를 통지받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심사자료에는요?”

“제공 동의와 절차 이행 사실은 남길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원하는 조합이었다.

상대의 반응은 받지 않고, 내 행동은 기록한다.

그것이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제도는 행동을 기록해야 했고, 심사는 기록으로 판단했다. 기록되지 않은 행동만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도 거짓이었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위해 어느 칸을 바라보는지였다.

“한재호 씨.”

서기현이 말했다.

“피해자가 참여하지 않으면 실망할 겁니까?”

“프로그램이 진행되지 않으니까요.”

“피해 회복이 안 됐다고 생각합니까?”

“자료는 다른 절차로 갑니다.”

“그런데 왜 실망하죠?”

나는 답하지 못했다.

참여가 거부되면 내가 용서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시도한 사람으로 완성되지 못하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혼자 신청하고 상대가 거부한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정호의 반송 확인서 일곱 장이 떠올랐다. 그는 돈이 돌아올 때마다 다음 송금의 이유를 얻었다. 거절이 관계를 끝내지 않고 반복하게 만드는 재료가 됐다.

“거부하면 다시 신청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건 프로그램 규칙입니다.”

“규칙이 없어도요.”

서기현은 처음으로 손바닥을 치웠다.

내가 전날 밤 써둔 참여 목적이 보였다.

사고의 사실관계를 정확히 전달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며 진정한 사과와 책임을 실천하기 위해 참여를 희망합니다.

문장은 틀리지 않았다.

동시에 거의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며`라는 말은 박미영이 나를 이해시켜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정한 사과`는 누가 진정함을 판정하는지 적지 않았다.

나는 그 문장에 줄을 그었다.

서기현은 새 문장을 제안하지 않았다.

나는 책상 가로대 때문에 몸을 더 앞으로 숙여야 했다. 오른팔을 오래 뻗지 않도록 종이를 무릎 위 집게판으로 옮겼다.

다음과 같이 썼다.

박미영 씨 측이 요구한 사고 원자료와 의사결정 기록을 제공하는 데 동의합니다. 직접 만남, 답변, 용서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자료 제공만 원하는지 독립 담당자가 대리인을 통해 한 차례 확인하는 데 동의하며, 거부하거나 답하지 않을 경우 다시 연락하지 않습니다.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썼다.

상대방의 평가나 반응을 가석방 심사자료로 요청하지 않습니다.

“자료 제공 동의는 이미 변호사에게 했습니다.”

서기현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프로그램에서 새로 하는 일은 참여 의사 확인뿐입니다.”

“네.”

“그 연락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다시 망설였다.

박미영 측은 이미 자료를 요구했다. 직접 대화를 원했다면 대리인을 통해 말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이 한 번 묻는 것은 선택지를 알려주는 일이면서, 그녀가 요구하지 않은 질문을 추가하는 일이었다.

“자료 제공만 원하는지를 확인하는 데 한정하겠습니다.”

“그 확인조차 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대리인이 답하지 않으면 됩니다.”

내 말은 규칙상 맞았다. 하지만 답하지 않는 데에도 메일을 읽고 판단하고 내부에서 상의하는 시간이 들 수 있었다.

“연락문을 제가 볼 수 있습니까?”

“상대에게 보내기 전에는 안 됩니다. 수형자가 문구를 통제할 수 없도록 독립 담당자가 작성합니다.”

“제 사과는 들어가지 않죠?”

“요청하지 않으셨으니 들어가지 않습니다.”

“가석방도요?”

“언급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청서에 서명했다.

서기현은 접수일을 적고 사본 한 장을 주었다.

“사전교육 참여 사실은 기록합니다. 상대의 거부나 무응답은 불이익 자료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참여 의사가 있으면요?”

“그때 원하는 범위를 다시 확인합니다. 한재호 씨가 만남을 원하지 않는다고 바꿀 수도 있습니다.”

“제가요?”

“양쪽 모두 중단할 수 있습니다.”

나는 프로그램을 신청하면 끝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단하면 기회를 버리고 반성이 부족해 보일 것 같았다. 그러나 상대만 거부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책임과 강제는 같은 말이 아니었다.

면담을 마치고 의료동으로 돌아왔을 때 정호는 공용책상에서 영치금 사용내역을 보고 있었다. 이십만 원은 그대로였다. 그는 일반 피해지원기금 안내문을 옆에 두었지만 신청서를 쓰지 않았다.

“썼나?”

정호가 내 집게판을 가리켰다.

“신청했습니다.”

“만나게 해준대?”

“만나지 않겠다고 썼습니다.”

“그럼 왜 신청해?”

“자료만 원하는지 확인하려고요.”

정호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오후 약 배부가 끝날 무렵 나도윤이 접수 통지를 가져왔다.

독립 담당자는 박미영 측 대리인에게 직접대화 요청이 아니라 원자료 제공 절차만 이용할 의사가 있는지 한 차례 문의할 예정이었다.

통지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상대방이 응답 공개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 신청인에게는 절차 진행 여부 외의 정보가 제공되지 않습니다.

나는 박미영이 자료를 받았는지조차 모를 수 있었다.

그래도 동의는 철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