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건너는 해
내가 승인한 것으로 하라

에피소드 20 / 50

서준호가 재생 버튼을 다시 눌렀다.

“알아. 센서 다시 잡고 구 점 이 나왔잖아.”

녹음 속 내 목소리가 한 번 더 지나갔다. 그 뒤에는 바람과 발전기 소리만 십여 초 이어졌다. 누군가 안전화로 자갈을 밀었다.

민석의 목소리가 말했다.

“다시 잰다고 처음 게 없던 건 아니잖습니까.”

“센서 고정이 흔들렸다며.”

내가 대답했다.

“그게 센서가 잘못된 건지 기둥이 움직인 건지 모른다면서요.”

이번에는 박진수의 목소리였다. 기억보다 높고 빨랐다. 나는 그가 천천히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사고 뒤 내 머릿속에서 신중한 숙련공의 목소리로 고쳐놓았을 수 있었다.

“내일 점검업체 오니까 확인하면 됩니다.”

녹음 속 내가 말했다.

“그때까지 3구간은 건드리지 말자는 겁니다.”

박진수가 말했다.

“오늘은 보강만 해. 집중하중 안 걸어.”

“인원은 내일 그대로 들어갑니까?”

민석이 물었다.

“점검 끝나면.”

“업체 또 늦으면요?”

“그건 내일 판단하고.”

전화 진동음이 들렸다. 녹음 속 내가 잠시 멀어졌다. 발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에서 울렸다.

“네, 본부장님.”

내 목소리만 들렸다. 상대의 말은 녹음되지 않았다.

“전면 중단은 아닙니다. 오늘 3구간 집중작업만 미룹니다.”

침묵.

“보강팀은 그대로 갑니다.”

다시 침묵.

“점검은 내일 오전입니다.”

내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연 사유는 제가 쓰겠습니다. 네. 일정 영향 없게 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난 뒤 조병철로 추정되는 남자가 물었다.

“본부장님 뭐랍니까?”

“하루 밀리면 경영회의에 내가 직접 보고하래.”

“그럼 내일 업체 늦어도 기다립니까?”

녹음 속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발전기 소리 사이로 무전 호출이 두 번 들어왔다.

“인원하고 장비는 준비해.”

내가 말했다.

“점검 결과 보고 시작한다.”

박진수가 다시 말했다.

“소리는 계속 납니다.”

“반장 통해서 기록 남겨주세요.”

“기록하는 동안 무너지면요?”

그 문장 뒤에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나는 녹음이 끊길 때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서준호가 재생을 멈췄다.

“첫 번째 파일은 여기까지입니다.”

“저날 작업은 안 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집중하중 작업은 다음 날로 미뤘습니다.”

“네.”

“김도현 권고를 따른 겁니다.”

“그 사실도 남습니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붙였다. 회사가 압박했다는 말도 녹음에 있었다. 장석호는 하루 지연 사유를 내가 직접 경영진에게 보고하게 했고 일정 영향이 없게 하라고 요구했다.

동시에 박진수는 처음 값과 이상음을 말했다.

두 진실이 같은 파일 안에 있었다.

“다음 파일은 사고 당일 오후 세 시 사십 분부터입니다.”

서준호가 말했다.

점검업체는 그날 오전에 오지 못했다. 교통사고로 고속도로가 막혔다고 했다. 대신 현장 시설팀과 시공사가 보강상태를 확인했고, 외부 점검자는 사진과 측정값을 원격으로 검토했다. 그는 현장확인 없이 최종 안전판정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기억했다.

녹음이 시작됐다.

회의실 에어컨 소리가 컸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조병철이 말했다.

“재측정은 세 번 다 구 점 이 전후입니다. 보강도 끝났습니다.”

다른 남자가 말했다.

“사진으로는 브래킷 체결 확인했습니다. 다만 도면하고 각도 차이는 있습니다.”

내 목소리가 물었다.

“안전율 다시 계산하면 얼마나 걸립니까?”

“오늘 밤은 지나야 합니다.”

“현재 기준으로 사용 중지 사유가 있습니까?”

침묵 뒤 김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스피커를 통한 소리라 얇고 울렸다.

“법적 사용 중지 여부를 제가 지금 확정하긴 어렵습니다. 안전 의견은 작업 보류입니다. 현장확인이 안 됐고 초기값 원인도 확인 안 됐습니다.”

“재측정은 기준 안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건 압니다. 하지만 같은 하중조건인지 확인이 안 됐고—”

조병철이 끼어들었다.

“자동화설비 차가 이미 입구에 와 있습니다. 오늘 못 내리면 반송비하고 재배차비 발생합니다.”

다른 사람이 인원 대기비와 야간수당을 말했다. 숫자들이 빠르게 오갔다. 삼천이백만 원, 이천팔백만 원, 하루 지연 1억 이상.

김도현의 목소리는 스피커에서 계속 나왔다.

“비용 문제는 이해하지만 안전팀 의견은 보류입니다.”

내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도 장석호였다. 통화 내용은 내 쪽만 들렸다.

“업체가 못 왔습니다.”

침묵.

“내부 확인은 끝났습니다.”

침묵이 길었다.

“안전팀은 보류 의견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 뒤 내 목소리가 더 낮아져 일부는 들리지 않았다. 분석표에는 청취 불명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마지막 부분만 분명했다.

“현장 판단으로 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회의실 안에서 누군가 물었다.

“어떻게 합니까?”

나는 십일 초 동안 답하지 않았다. 녹음파일의 파형표에서 그 부분은 거의 평평했다.

“3구간 보강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집중작업 들어갑니다.”

내가 말했다.

“초기 한 시간은 하중 절반으로 하고 변위 계속 봐요. 구 점 오 넘으면 즉시 중단.”

김도현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커졌다.

“한 부장님, 저는 동의 못 합니다.”

“의견은 보고서에 남기세요.”

“현장확인 전에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의 말을 잘랐다.

조병철이 물었다.

“승인자는 어떻게 남깁니까?”

“내가 승인한 것으로 하세요.”

녹음 속 문장은 작았다. 누구도 강조하지 않았다. 곧바로 작업구간 분리와 장비 동선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그 문장을 기억했다.

사고 뒤 수사에서도 말했다. 최종 승인은 내가 했다고. 다만 그때 내가 책임진다고 생각한 것은 지연 비용과 경영진 보고, 혹시 생길 경미한 설비 손상이었다. 사람이 죽는 결과까지 떠올리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녹음은 내가 무엇을 상상했는지 보여주지 않았다.

내가 어떤 말을 듣고 무엇을 결정했는지는 남겼다.

세 번째 파일 끝에는 작업자들의 무전이 있었다. 박진수가 3번 기둥 이상음을 다시 보고했다. 조병철은 변위값을 확인하라고 답했다. 측정 담당자는 9.3이라고 말했다.

그 뒤 이십여 분 동안 녹음이 없었다.

네 번째 파일은 사고 직전 삼 분이었다. 민석이 케이블을 정리하면서 녹음을 켠 것으로 추정됐다.

금속이 길게 우는 소리가 났다.

기억 속에서 나는 그 소리를 낮고 무거운 소리로 만들었다. 실제 녹음에서는 얇고 날카로웠다. 큰 문을 천천히 여는 소리와 비슷했다.

누군가 말했다.

“또 난다.”

무전기로 박진수가 작업반장을 불렀다. 대답이 잡음에 묻혔다. 민석이 욕을 작게 했다.

그다음에는 소리가 겹쳤다.

철골, 발소리, 고함, 무전 호출.

서준호는 붕괴음이 시작되기 전에 재생을 멈췄다.

“여기까지만 듣겠습니다.”

“끝까지 틀어주십시오.”

“법률 판단에 필요한 내용은 확인했습니다.”

“사람 목소리가 더 있잖습니까.”

“지금 들을 이유를 먼저 정하십시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박진수와 오광철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고 싶어서인지, 내가 현장에 있었다는 벌을 받으려는 것인지, 녹음에서 나를 변호할 한 문장을 더 찾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서준호는 기기를 껐다.

“이 자료는 회사와 다른 책임주체에 대한 추가 조사를 요구할 근거가 됩니다.”

그가 말했다.

“장석호의 압박, 최종보고 작성 경위, 외부 점검 없이 진행된 절차 모두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제 재심은요?”

“회사 책임이 더 확인되더라도 한재호 씨 승인과 위험 인지는 기존 판결보다 선명해졌습니다. 형사절차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는 검토해야 합니다.”

내가 원했던 진실은 있었다.

회사는 일정을 요구했고, 안전팀이 책임지지 않으려 보류만 외친 것도 아니었다. 김도현은 구체적인 이유를 말했다. 현장소장과 시설팀은 낮은 수치를 근거로 가능하다고 했고, 나는 그중 진행할 수 있는 말을 선택했다.

나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 문장은 나를 꺼내주지 않았다.

“녹음과 메일을 박미영 씨 쪽 공개자료에 포함하십시오.”

내가 말했다.

“오광철 씨 위험 인지 여부와 관련된 부분, 최종 의사결정 경위에 필요한 범위로 제공하겠습니다.”

“제가 동의했다는 말은 하지 마시고요.”

“필요한 절차상 동의 주체는 표시될 수 있습니다. 평가 문구는 넣지 않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선택이 가석방에 불리할지 유리할지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좋은 행동으로 기록하려는 마음은 있었다. 그 마음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의료동으로 돌아왔을 때 저녁 배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정호의 식판은 침대 옆 탁자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밥에서 김이 거의 사라졌다.

“안 드십니까?”

“오늘은 금식하네.”

“왜요?”

정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진이 약 카트를 밀고 들어와 식판을 보았다.

“이정호 씨, 저녁 드셔야 약 복용할 수 있어요.”

“오늘 하루만 안 먹겠습니다.”

“사유가 뭡니까?”

정호는 성경 사이에 끼운 작은 달력을 꺼냈다. 오늘 날짜에 검은 점이 찍혀 있었다.

“은희 죽은 날입니다.”

서진은 그를 위로하지도 꾸짖지도 않았다.

“금식이 치료보다 우선인지 의사 확인이 필요합니다. 지금 드시는 약은 공복 복용하면 안 됩니다.”

“벌 받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나.”

“식사를 거르는 게 누구한테 가는 벌인데요?”

정호는 식판을 보았다.

“나한테 가지.”

서진이 말했다.

“그러면 죽은 분한테는 가지 않네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정호는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나도 그의 식판에 손대지 않았다.

식은 밥과 약봉지가 탁자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