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9 / 50
회신은 한 줄이었다.
재측정값 기준으로 보고 정리 바랍니다. 일정 준비는 유지하십시오.
서준호는 문장을 두 번 읽게 했다. 첫 번째는 내용만, 두 번째는 위아래의 송수신정보와 함께였다.
발신: 한재호.
수신: 김도현.
참조: 조병철, 정다은.
발신 시각: 사고 전날 오후 두 시 사십육 분.
발신 단말: HJH-LT02.
접속 위치: 서부물류센터 현장사무실 무선망.
HJH는 내 영문 이니셜이었다. LT02는 회사가 지급한 두 번째 노트북이라는 뜻이었다. 첫 번째는 액정이 깨져 교체했다.
“이 노트북 기억납니까?”
서준호가 물었다.
“회색이었습니다. 화면이 십사 인치였고.”
“사고 전날 현장에 가져갔고요?”
“항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오후 두 시 사십육 분에 어디 있었습니까?”
나는 그날 일정을 떠올렸다. 점심 뒤 3구간 실측이 있었고, 다섯 시에는 현장회의가 있었다. 정확히 두 시 사십육 분에 내가 어디에 서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현장 안에 있었을 겁니다.”
“노트북도 들고 다녔습니까?”
“실측할 때는 회의실에 뒀습니다.”
“잠겨 있었고요?”
“화면은 자동으로 잠겼습니다.”
“몇 분 뒤에?”
“십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확하지 않았다. 회사 보안정책은 오 분일 수도 있었고, 현장에서는 자꾸 잠기는 것이 불편해 시간을 늘렸을 수도 있었다.
“정다은 씨나 다른 직원이 비밀번호를 알았습니까?”
“비밀번호를 알려준 적은 없습니다.”
“로그인된 상태에서 대신 메일을 보내달라고 한 적은요?”
나는 대답하기 전에 오래 멈췄다.
회의 중 자료를 띄워둔 채 전화를 받으러 나간 적은 많았다. 정다은에게 파일을 전달하거나 회의 초대를 보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내 계정으로 메일을 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문구를 지시했는지 기억납니까?”
“이 메일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문장 방식은요?”
나는 한 줄을 다시 읽었다.
재측정값 기준으로 보고 정리 바랍니다.
일정 준비는 유지하십시오.
마침표를 찍고, 두 문장을 비슷한 길이로 나누고, 요청 대신 `바랍니다`를 쓰는 방식은 내 문장과 닮아 있었다. 정다은도 내가 쓰는 메일을 매일 보았으니 따라 쓸 수 있었다.
그 생각은 가능성과 비겁함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제가 썼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가능성 말고 현재 기억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서준호는 기록지에 그대로 적었다.
“회신 내용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재측정 결과가 유효하면 그 값을 기준으로 보고하라는 뜻입니다.”
“초기값은요?”
“원자료에 남겨야죠.”
“그 말은 회신에 없습니다.”
“정리한다는 게 삭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최종 보고서에서는 빠졌습니다.”
“김도현이 원본은 보관했잖습니까.”
“한재호 씨가 보관하라고 지시한 건 아닙니다.”
“안 지웠다고 해서 문제입니까?”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준호는 펜을 내려놓았다.
“문제가 있다고 결정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어떤 주장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반박될지 확인하는 겁니다.”
“회사가 초과값을 지웠다고 했는데 원본은 남아 있습니다.”
“회사는 원본을 보관하면서 최종 의사결정 문서에서는 제외했습니다. 그 차이를 설명해야 합니다.”
“센서 오류였으니까요.”
“추정이었습니다.”
“재측정 세 번이 다 기준 안이었습니다.”
“같은 하중조건인지 확인되지 않았고요.”
우리는 앞서 본 문장을 다시 돌고 있었다. 숫자는 늘어나지 않았고 말만 위치를 바꿨다.
서준호는 다른 표를 꺼냈다. 메일 원본의 헤더와 회사의 최종보고 작성기록을 시간순으로 놓은 것이었다.
14:38 김도현 초기계측 메일 발송.
14:41 내 계정 첨부 열람.
14:46 내 계정 회신.
15:03 시설팀 공용계정 최종 측정표 초안 생성.
15:19 조병철이 현장회의 자료에 최종 측정표 첨부.
초과값이 빠진 표는 내 회신 뒤 십칠 분 만에 만들어졌다.
“제 문장이 삭제 지시였다는 겁니까?”
“그렇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재측정값 기준`이라고 했지 `초기값 삭제`라고 안 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지시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간표를 이렇게 만들면 제가 지운 것처럼 보이잖습니까.”
“결과적으로 어떤 행동이 이어졌는지 보는 겁니다.”
나는 그 말을 알고 있었다. 사고에서도 의도보다 결과가 남았다. 나는 붕괴를 원하지 않았지만 작업을 승인했고, 회신에서 삭제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낮은 값만 최종보고에 남았다.
그 둘을 같은 종류로 묶고 싶지 않았다.
“회사가 일정 준비를 유지하라고 압박한 메일도 같은 표에 넣으십시오.”
“넣습니다.”
“장석호가 전면 중단을 경영진 보고 대상으로 만든 것도요.”
“당연합니다.”
“그러면 제가 왜 이런 회신을 했는지 보이겠죠.”
서준호가 나를 보았다.
“왜 했는지 설명되는 것과 안 한 것이 되는 건 다릅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회사 압박은 내가 원한 진실이었다. 그 진실이 나오면 내 선택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선택의 조건이 더 선명해졌다. 장석호가 어떤 결과를 요구했고, 내가 그 요구를 현장 문장으로 바꾸어 보냈는지 시간표가 보여주었다.
“박미영 씨 쪽에는 무엇이 전달됐습니까?”
내가 물었다.
“원본 측정표가 보존되어 있고 적법한 공개절차에 협조한다는 답을 보냈습니다. 오광철 씨 위험 인지 문구와 관련된 자료는 별도 분류 중이고요.”
“제 회신도 갑니까?”
“최종보고 작성 경위에 관련되므로 제공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회사 압박 메일도 함께 보내십시오.”
“선별 기준에 따라 관련자료를 묶어서 제공합니다.”
“제 것만 가면 안 됩니다.”
말하고 나서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분명해졌다. 박미영이 내 문장만 읽을까 봐 두려웠다. 장석호의 문장과 시설팀의 주석 사이에 내 문장을 넣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료는 한재호 씨를 공정하게 보이게 만드는 순서가 아니라 사건 경위를 확인할 수 있는 순서로 갑니다.”
서준호가 말했다.
그 말이 불공정하게 느껴졌다.
접견실 의자에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있자 오른쪽 어깨보다 허리 아래의 둔한 열감이 먼저 올라왔다. 나는 말을 멈추고 상체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방석 한쪽에서 압박을 빼며 열을 셌다.
서준호는 그동안 다음 서류를 펼치지 않았다.
“계속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자세를 되돌리며 말했다.
“최민석 씨 자료가 제출됐습니다.”
그가 말했다.
녹음파일은 모두 네 개였다. 사고 전날 현장회의, 사고 당일 오전 작업 전 회의, 오후 점검 뒤 대화, 사고 직전 무전 일부. 민석이 직접 녹음한 것은 두 개였고, 나머지는 현장 작업반장이 휴대전화에 보관한 파일을 전달받은 것이라고 했다.
“원본 확인됐습니까?”
“휴대전화 두 대의 추출기록과 파일 생성시각을 검토 중입니다. 편집 흔적은 1차 분석에서 발견되지 않았지만, 대화 전체 맥락과 화자 식별이 남았습니다.”
“왜 녹음했답니까?”
“이상음 보고가 반복해서 묵살된다고 생각해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소송 준비를 한 겁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민석의 행동에 의도를 붙이려 했다. 녹음이 계획된 공격이면 내용의 신뢰도도 줄어들 것 같았다. 실제로는 왜 녹음했는지와 무엇이 녹음됐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제 목소리가 있습니까?”
“세 파일에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추정?”
“화자 확인 전입니다. 서부물류센터 회의 영상의 음성과 비교할 예정입니다.”
“제가 들을 수 있습니까?”
“변호인 열람 범위에서 가능합니다. 오늘은 파일 하나의 첫 부분만 준비했습니다. 전체는 다음 접견 때 듣는 게 좋겠습니다.”
서준호는 작은 녹음기를 탁자 위에 놓았다. 교도관에게 허가 문서를 보여주고 기기 번호를 확인받았다. 녹음기는 외부망에 연결되지 않는 재생 전용 장치였다.
“어떤 파일입니까?”
“사고 전날 오후 현장회의가 끝난 뒤 복도 대화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누구하고요?”
“최민석 씨, 박진수 씨, 화자 미상 한 명, 한재호 씨 추정 음성이 있습니다.”
박진수의 목소리.
나는 유류품 목록과 점심식당의 농담보다 그의 실제 목소리를 오래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 속 목소리는 내가 문장으로 다시 만든 것일 수 있었다.
서준호가 재생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원하시면 다음에 듣겠습니다.”
“지금 틀어주십시오.”
기기에서 바람 소리가 먼저 나왔다. 옷에 휴대전화가 스치는 소리, 멀리서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 누군가 기침하는 소리가 섞였다.
잠시 뒤 민석의 목소리로 추정되는 남자가 말했다.
“한 부장님, 처음 거 십 넘은 건 아시죠?”
그다음 내 목소리가 들렸다.
“알아. 센서 다시 잡고 구 점 이 나왔잖아.”
서준호가 재생을 멈췄다.
방 안에 내 목소리의 끝이 남았다.
계정 열람기록은 다른 사람이 만들었을 수 있었다.
94바이트의 회신도 누군가 대신 썼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녹음 속 나는 초기값을 알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여전히 사실일 수 있었다. 육 년 뒤의 내가 그 복도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과, 그날의 내가 숫자를 들었다는 것은 함께 존재했다.
나는 녹음기를 다시 보았다. 다음 문장을 들으면 무엇이 더 남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원했던 회사의 압박도 들어 있을 수 있었고, 그 압박을 받아 현장에 전달한 내 말도 들어 있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어느 한쪽만 먼저 들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