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건너는 해
봉인번호 0318

에피소드 16 / 50

외장하드는 내 손에 오지 않았다.

서준호는 접견실 탁자 위에 투명한 증거물 봉투를 올려놓았지만, 봉투와 내 사이에는 손바닥 두 개만 한 거리가 남아 있었다. 그는 내가 가까이 보려고 몸을 숙이자 봉투를 자기 쪽으로 조금 당겼다.

“만지시면 안 됩니다.”

검은 외장하드는 사진에서 본 것보다 작았다. 모서리의 고무가 한쪽 벗겨져 있었고 연결단자 주변에 흰 먼지가 끼어 있었다. `서부 PM 공용백업 2`라고 쓴 라벨은 가운데가 들떠 있었다.

봉투 위쪽에는 붉은 봉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봉인번호 0318.

“작동은 합니까?”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전원만 연결해보면 되잖습니까.”

“원본을 바로 연결하면 파일정보가 바뀔 수 있습니다. 정상인지 확인하는 것도 포렌식 업체에서 쓰기방지 장비를 사용해 해야 합니다.”

나는 외장하드의 연결단자를 보았다. 회사에서는 이런 장치를 수없이 사용했다. 회의실 노트북에 꽂고 폴더를 열어 파일을 복사했다. 그때는 케이블을 연결하는 일이 증거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창고에서 가져오는 과정은 기록했습니까?”

“업체 직원이 꺼내는 장면부터 촬영했고, 운송기사 인수 시간과 저희 사무실 도착 시간을 적었습니다. 처음 봉인은 창고업체 번호 7842였고, 사무실에서 외관 촬영 뒤 지금 봉투로 바꿨습니다.”

“봉인을 왜 바꿉니까?”

“창고 물류용 봉투라 장기보관에 맞지 않았습니다. 개봉 전후를 영상으로 남겼고 담당자 두 명이 서명했습니다.”

“그럼 증거로 쓸 수 있습니까?”

“쓸 수 있다는 말과 내용이 사실이라는 말은 다릅니다.”

서준호는 인수기록 사본을 펼쳤다. 날짜, 시각, 담당자, 봉인번호가 표로 적혀 있었다. 물건 하나가 이동할 때마다 누가 손에 들었는지 남았다.

사고 당일 작업승인도 그렇게 남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김도현의 보류 권고.

장석호의 일정 지시.

조병철의 작업 가능 의견.

박진수의 이상음 보고.

내가 어느 문장을 언제 들었고, 무엇을 빼고 누구에게 전달했는지 봉인번호처럼 이어졌다면 재판은 달라졌을 수 있었다.

내 책임이 더 분명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뒤에 왔다.

“오늘 바로 복제합니까?”

“회사에서 이의가 들어왔습니다.”

서준호가 두 번째 서류를 꺼냈다.

발신인은 서진로지스 법무팀이었다. 회사는 외장하드가 업무용 자산이며 영업비밀과 직원 개인정보, 거래처 자료가 포함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임의 열람과 외부 제공을 중단하고 반환 절차를 협의하라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벌써 압니까?”

“저희가 소유권과 비밀정보 문제를 확인하려고 공문을 보냈습니다.”

“왜 회사에 먼저 알립니까?”

“남의 자료일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 회사가 자료를 숨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반환하지 않고 봉인한 겁니다.”

“알리지 않았으면 먼저 볼 수 있었잖습니까.”

서준호가 나를 바라봤다.

“그 방식으로 얻은 자료를 법원에 내면 회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공문 첫 장을 넘겼다. 회사는 외장하드 자산번호가 지워져 있어 소유 여부를 즉시 확인하기 어렵다고도 적었다. 반환을 요구하면서 자기 물건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말이 모순됩니다.”

“보존을 요구하면서 권리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문장입니다.”

“회사다운 문장이군요.”

“한재호 씨도 이런 문장을 많이 썼겠죠.”

그의 말투에는 비난이 없었다. 그래서 부정하기 어려웠다.

사고 전 나는 이메일 끝에 ‘본 메일은 작업승인을 의미하지 않으며 현장 조건 확인 후 최종 결정 바랍니다’라고 자주 썼다. 지시를 하면서 승인하지 않았다고 적었고, 결정을 요구하면서 책임은 현장에 남겼다.

“복제도 못 합니까?”

“원본을 변경하지 않는 보존 목적 복제는 진행할 겁니다. 다만 내용을 열람하고 소송이나 언론 대응에 쓰는 것은 별도 문제입니다.”

“언론에 먼저 공개하면 회사가 자료를 없애지 못합니다.”

“이미 원본을 확보했습니다.”

“다른 자료 말입니다.”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공개부터 생각하지 마십시오.”

“민석 씨가 먼저 말했잖습니까. 최초 측정값하고 녹음이 남아 있다고.”

“그 자료와 이 외장하드가 연결된다는 근거는 아직 없습니다.”

“공용백업입니다.”

“라벨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정다은 글씨가 맞습니다.”

“본인에게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서준호는 모든 문장 뒤에 아직을 붙였다. 나는 그 아직들이 회사를 보호한다고 느꼈다. 실제로는 자료가 증거가 되기 위해 필요한 간격일 수 있었다.

“비용은 얼마나 듭니까?”

“원본 이미지 복제와 해시값 산출, 기본 파일목록까지 사십팔만 원입니다. 삭제파일 복구나 키워드 검색은 별도고요.”

내 영치금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창고 확인비와 한 달 보관비가 빠지면 남는 돈이 사십만 원 남짓이었다. 생활품과 전화비를 모두 끊어도 부족했다.

“법률사무소에서 먼저 지급하겠습니다.”

서준호가 말했다.

“나중에 성공보수에서 빼는 겁니까?”

“이 사건은 성공보수 약정이 없습니다. 소송비용으로 정산하되, 재심이나 별도 절차를 하지 않으면 분할해서 갚는 방식으로 협의하죠.”

“결과가 없어도 갚아야 하고요.”

“네.”

나는 금액을 적었다.

480,000원.

그 숫자는 외장하드 안에 진실이 있다는 믿음의 가격처럼 보였다. 그러나 업체가 보장하는 것은 파일을 훼손하지 않고 복제한다는 일이었다. 진실의 유무는 상품 항목에 없었다.

“진행하십시오.”

내가 말했다.

“파일목록만 먼저 받습니다. 내용을 열기 전 회사와 열람 범위를 협의하고, 필요하면 법원 절차를 검토하겠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장치 상태가 정상이면 이틀, 손상이 있으면 더 걸립니다.”

또 이틀이었다.

창고 상자를 기다린 이틀과 다른 이틀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자꾸 결과를 앞당겨 생각했다.

회사 본부장이 공기 단축을 지시한 메일.

안전팀이 최초 측정값을 보고한 문서.

법무팀이 사고 뒤 문구를 고친 기록.

그중 하나만 있어도 판결문에서 내 이름이 차지한 자리가 줄어들 것 같았다.

“재심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아직 답할 수 없습니다.”

“회사 지시가 명확하면요?”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존 재판에서도 일부 인정됐습니다.”

“측정값 조작이 확인되면?”

“누가 어떤 값을 언제 바꿨고 한재호 씨가 무엇을 알았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제가 조작된 값을 받았다면 책임이 줄어들잖습니까.”

“줄어들 수 있습니다.”

서준호가 말했다.

“동시에 조작 전 경고를 따로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면 달라질 수 있고요.”

나는 박진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수치 말고 소리요.

숫자가 거짓이었다면 내 판단도 속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숫자 밖에서 들은 말은 남아 있었다.

“법원은 그래도 정확한 자료를 봐야 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건 맞습니다.”

접견이 끝날 시간이 되자 서준호는 외장하드 봉투를 다시 서류가방에 넣었다. 봉인번호 0318이 가방 안으로 사라졌다.

“사무실 금고에 보관합니다. 원본은 복제할 때만 이동하고요.”

“업체 직원 이름도 기록하십시오.”

“그렇게 합니다.”

“회사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요.”

“당연합니다.”

나는 그가 가방 지퍼를 닫는 것을 끝까지 봤다.

의료동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외부진료 이동과 동선이 겹쳐 두 번째 철문 앞에서 십칠 분을 기다렸다. 휠체어 방석 아래로 열이 차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도윤에게 압박을 풀 수 있게 잠시 벽 쪽 공간을 요청했다.

“여기서 하시면 됩니다. 반대편 문 열릴 때까진 이동 없습니다.”

나는 팔걸이를 짚고 몸을 들었다. 열을 세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파일 이름을 만들었다.

최종측정_원본.

본부장지시.

사고전회의.

내가 원하는 제목이었다.

실제 파일은 전혀 다른 이름일 수 있었다. `새 폴더`, `최종`, `최종2`, `임시` 같은 이름 안에 중요한 내용이 섞여 있을 수도 있었다. 회사에서는 사람들이 파일을 그렇게 저장했다.

방으로 돌아오자 정호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탁자에 인수기록 사본을 펼쳤다. 봉인번호와 해시값 설명이 적혀 있었다.

해시값은 디지털 자료의 지문과 같다고 서준호가 설명했다. 복제 전후 값이 같으면 내용이 바뀌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같은 것은 같다고 증명할 수 있었다.

사람의 기억과 진술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당시 위험을 얼마나 알았는지, 왜 승인했는지, 어떤 문장을 중요하게 들었는지는 같은 방식으로 비교할 수 없었다.

이틀 뒤가 아니라 사흘 뒤 파일목록이 왔다. 외장하드 연결단자가 불안정해 이미징을 두 번 시도했다고 했다. 원본과 복제본의 해시값은 일치했다.

서준호는 접견을 잡지 못해 목록 첫 장만 팩스로 보내왔다. 파일 내용은 없고 폴더 경로와 용량, 수정일시만 적혀 있었다.

전체 파일 수 38,416개.

서부물류센터 폴더 6,208개.

현장사진, 공정관리, 계약, 설계변경, 안전, 회의, 사용자백업.

나는 `안전` 폴더에 손가락을 댔다. 그 아래에는 `측정`, `보강`, `점검업체`가 있었다. 기대했던 이름들이었다.

다음 줄에서 손이 멈췄다.

`사용자백업\한재호\메일보관`.

용량은 9.7기가바이트였다.

사고 전후 내 회사 메일함 전체에 가까운 크기였다.

장석호가 내게 보낸 지시가 있을 수 있었다.

내가 조병철에게 보낸 지시도 있을 수 있었다.

회사가 지운 문장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내가 지운 문장도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목록 아래에는 열람 보류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파일을 아직 하나도 읽지 못했다.

그런데도 처음으로 외장하드가 두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