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건너는 해
우주선 폐기 동의서

에피소드 15 / 50

우주선 상자는 이미 한 번 열려 있었다.

이틀 뒤 서준호가 보여준 사진에서 포장 비닐은 오른쪽 모서리부터 찢겨 있었다. 상자 뚜껑을 붙잡은 투명테이프도 한쪽이 잘렸다가 다시 눌러 붙은 흔적이 있었다.

“업체에서 연 겁니까?”

“아닙니다. 도착했을 때부터 그 상태였답니다.”

접견실 태블릿 화면에 사진 열두 장이 차례로 떠 있었다. 첫 장은 `유리 만들기`라고 적힌 갈색 상자였다. 둘째 장에는 상자 안에서 꺼낸 물건들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색종이 묶음, 굳은 점토, 플라스틱 자, 글루건, 초등학교 미술 준비물, 그리고 우주선 조립블록.

장난감 상자 표면은 햇빛을 받지 않았는데도 색이 바래 있었다. 모서리 하나가 눌려 흰 종이층이 드러났다. 우주선 그림 아래에는 대상 연령 8세 이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리는 이제 열다섯 살이었다.

“내용물은 다 있답니까?”

“안쪽 봉지는 개봉하지 않았습니다. 겉상자만 열어본 상태고요.”

“누가 열었는지는요?”

서준호가 인쇄물 한 장을 건넸다. 수진이 창고업체에 물품 배경을 설명하며 보낸 메모였다. 법률대리인을 거쳐 전달된 것이어서 문장은 짧았다.

우주선 블록은 사고 다음 해 이사할 때 한유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유리는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구매자가 한재호 씨이고 당시 사건 관련 물품일 수 있어 임의 폐기하지 않고 보관했습니다.

나는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에 시선이 멈췄다.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까?”

“누구에게요?”

“수진한테요.”

“지금 필요한 확인입니까?”

“원하지 않았다는 게 만들기 싫다는 건지, 저한테 받은 물건이라 싫다는 건지 다르잖습니까.”

“폐기 여부를 결정하는 데는 같을 수 있습니다.”

“저한테는 다릅니다.”

서준호는 메모를 다시 보았다.

“그 차이를 확인하려면 유리 양에게 당시 감정을 설명하게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 연락 의사를 반복 확인하지 않겠다고 제안하신 것과도 어긋날 수 있고요.”

나는 태블릿의 우주선을 확대했다. 제품번호는 내가 사고 전날 휴대전화에서 대조했던 것과 같았다. 약속한 물건을 정확히 샀다. 늦었지만 샀고, 가장 큰 상자를 골랐고, 다른 제품으로 바꾸지 않았다.

그 사실들이 유리가 원하지 않았다는 문장 앞에서 줄을 섰다.

나는 선물 구매를 약속 이행으로 생각했다. 건네지 못한 뒤에도 물건이 남아 있으면 약속의 일부가 보존된다고 믿었다. 언젠가 유리에게 보여주면 내가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리는 이미 상자를 봤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그리고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진은 왜 그때 버리지 않았습니까?”

“메모에 적혀 있잖습니까. 구매자가 한재호 씨이고 사건 관련 물품일 수 있어서라고요.”

“저한테 알려줄 수도 있었잖습니까.”

“그때는 재판 중이었습니다. 이 물건이 증거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웠을 수 있고요.”

“그 뒤에는요?”

서준호가 안경을 벗어 닦았다.

“이 질문을 계속하면 결국 김수진 씨가 왜 한재호 씨 물건을 더 잘 관리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가 됩니다.”

“육 년 가까이 돈을 내면서 보관했는데요.”

나는 말을 하고 나서야 무엇을 확인했는지 알았다.

수진은 물건을 버리지 않았다.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약서와 메모가 보여준 것은 기다림보다 결정의 연기였다. 병원, 재판, 수감, 이혼조정. 수진에게도 당장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이어졌고, 매달 결제하면 다음 달로 넘길 수 있었다.

보관은 관계가 계속된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끝내지 못한 실무일 수도 있었다.

“장난감만 따로 보관하면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

“작은 택배상자 크기라 저희 사무실 문서보관실에 석 달 정도는 둘 수 있습니다. 그 뒤에는 다른 방법을 찾으셔야 합니다.”

“비용은요?”

“별도 보관료는 받지 않겠습니다.”

“그럼 석 달 보관해주십시오.”

말이 먼저 나왔다.

서준호는 신청서에 표시하지 않았다.

“석 달 뒤에는요?”

“그때 다시 결정하겠습니다.”

“무엇이 달라질 예정입니까?”

“조정 결과가 나오고, 유리 연락 의사도—”

나는 말을 멈췄다.

7월 3일.

표시하지 않았던 날짜가 머릿속에는 남아 있었다. 조정안 회신이 오면 가족관계도 새 상태로 바뀔 것처럼 생각했다. 유리가 먼저 연락할 가능성을 달력에 적지는 않았지만, 석 달이라는 보관기간 안에 몰래 넣고 있었다.

“다른 사진도 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는 화면을 넘겼다.

색종이 봉투에는 유리 이름과 초등학교 3학년 2반이 적혀 있었다. 글루건은 전선이 따로 묶여 있었고, 점토는 손가락으로 눌러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굳었다고 했다. 납작한 파일에는 만들기 도안과 완성품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그중 하나는 골판지로 만든 집이었다. 지붕은 빨간색, 벽은 노란색이었다. 창문이 세 개였고 사람 모형은 없었다. 사진 아래에 `내가 살고 싶은 집`이라고 인쇄된 활동지 제목이 보였다.

나는 집 안에 누가 사는지 확대해보려 했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았다.

“도안 내용도 촬영해달라고 할까요?”

서준호가 물었다.

“아닙니다.”

그것은 유리가 나에게 보내지 않은 학교 물건이었다. 창고 상자에 들어 있다는 이유로 내가 읽을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유리 물건은 수진에게 목록만 전달해주십시오. 가져갈 것인지 수진이 정하게 하고요. 우주선은 빼고요.”

“우주선은 보관합니까?”

나는 다시 사진을 봤다.

사고 전날 나는 장난감을 사는 데 십오 분을 썼다. 제품번호를 확인했고 가장 큰 상자를 골랐다. 그 십오 분은 현장보고를 읽는 시간과 같은 날에 있었다. 그렇다고 장난감이 사고의 원인은 아니었다. 좋은 아버지였다는 증거도 아니었다.

물건은 약속의 증거가 아니라, 주지 못한 물건이었다.

유리는 이미 거절했다.

“폐기하십시오.”

내가 말했다.

서준호가 폐기 동의서의 품목란에 적었다.

조립식 완구 1점.

“사유는 어떻게 할까요?”

“사유도 필요합니까?”

“업체 양식에 있습니다. 단순폐기, 훼손, 사용불가, 소유권 포기 중에 고를 수 있습니다.”

나는 사용불가를 고르고 싶었다. 유리에게는 더 이상 맞지 않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품 자체는 사용할 수 있었다.

“소유권 포기.”

서준호가 해당 칸에 표시했다.

나는 서명했다. 이번에도 책상이 높아 손목이 꺾였다. 글씨가 흔들렸지만 다시 쓰지 않았다.

“기부는 안 됩니까?”

서명 뒤에 물었다.

“미개봉 내부봉지라도 겉상자가 개봉됐고 장기보관 상태라 업체가 기부처를 연결하지는 않는답니다. 직접 수령해 확인하면 가능할 수는 있습니다.”

직접 수령할 사람은 없었다. 기부를 위해 또 누군가에게 일을 부탁하면 폐기는 며칠 더 미뤄질 것이다.

“그대로 처리해주십시오.”

나는 말했다.

책 상자 목록은 생각보다 짧았다. 물류관리와 경영서적 스물세 권, 영어책 아홉 권, 소설 일곱 권, 여행안내서 네 권. 업체는 책등이 보이도록 세 장을 찍었다.

나는 소설 일곱 권만 남겨달라고 했다. 출소 뒤 읽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내 경력을 다시 만들기 위해 보관하는 책은 아니었다.

회사 자료 사진은 마지막에 있었다.

두 상자 중 첫 번째에는 제안서와 월간 공정보고서, 계약 변경자료가 연도별 파일에 들어 있었다. 서부물류센터 자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맡았던 세 개 프로젝트가 섞여 있었다.

두 번째 상자에는 오래된 노트북 한 대, 케이블, 외장하드 두 개, 수첩 네 권이 있었다. 업체 직원은 전자기기를 켜지 않고 겉면만 촬영했다.

검은 외장하드 하나에 흰 라벨이 붙어 있었다.

`서부 PM 공용백업 2`.

내 글씨가 아니었다. 당시 프로젝트 관리팀 대리였던 정다은의 글씨처럼 보였다. 그는 문서 제목의 숫자 2를 아래로 길게 내렸다.

“이게 왜 제 물건에 있죠?”

“기억 안 납니까?”

“공용백업은 현장사무실이나 본사 자료실에 있어야 합니다.”

“사고 뒤 회사가 보낸 개인물품에 섞였을 수 있습니다.”

“회사가 이런 걸 그냥 보냈을 리 없습니다.”

내 목소리가 빨라졌다.

외장하드에는 공정표, 회의록, 현장사진, 이메일 백업이 있을 수 있었다. 최초 측정값이 남아 있을 수도 있고 회사의 지시가 기록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민석이 말한 자료와 같은 내용이거나, 그 주장을 확인할 다른 파일이 있을 수 있었다.

내 책임이 줄어들 수 있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우주선 폐기 동의서의 잉크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나는 다른 물건이 나를 위해 남아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원본 손대지 말고 확보해주십시오.”

내가 말했다.

서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다만 내용을 보기 전에는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마세요.”

“공용백업이면 회사 자료입니다.”

“빈 저장장치일 수도 있고, 다른 프로젝트 자료만 있을 수도 있고, 이미 재판에 제출된 것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회사에서 빼놓은 자료일 수도 있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는 내 기대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대는 더 커졌다.

“포렌식 복제와 열람 절차를 알아보겠습니다. 소유권과 개인정보 문제도 확인해야 합니다.”

접견이 끝난 뒤 의료동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우주선을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외장하드가 있었다. 검은 사각형 안에 사고의 다른 문장이 저장되어 있을 가능성.

회사도 알았다.

수치가 바뀌었다.

본사가 지시했다.

그 문장들이 내게서 무엇을 덜어줄지 계산했다.

방에 들어와서야 탁자 위에 놓인 폐기 동의서 사본을 봤다.

정호가 물었다.

“장난감은 어떻게 했나?”

“버리기로 했습니다.”

“아깝겠네.”

“유리가 원하지 않았답니다.”

“그래도 자네가 사준 건데.”

“사준 게 아닙니다.”

나는 사본을 접어 보관함에 넣었다.

“주지 못한 겁니다.”

우주선은 며칠 안에 폐기될 것이었다. 유리는 그 사실을 모를 수 있었다.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가족은 그 물건이 보관되는 동안 멈춰 있지 않았다. 수진은 돈을 냈고 일을 했고 이사를 준비했다. 유리는 상자를 열어보고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다른 것을 만들고 다른 장면을 찍었다.

그 시간 어디에도 내가 돌아올 자리는 예약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보관함을 닫았다.

잠시 뒤 다시 열어 외장하드 사진이 인쇄된 종이를 꺼냈다.

검은 장치 아래 라벨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가족에게 남겨둔 나중은 없었다.

회사 자료 안에는 아직 있다고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