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건너는 해
보관료 십일만 이천 원

에피소드 14 / 50

내 물건은 매달 십일만 이천 원어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준호가 가져온 것은 창고 이용계약서였다. 경기도 외곽의 셀프스토리지 업체 이름과 보관함 번호, 월 이용료가 적혀 있었다. 계약자는 김수진이었다.

“이게 아직 있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한재호 씨 물건을 보관한 창고라고 합니다.”

“무슨 물건이요?”

서준호는 계약서 뒤에 붙은 목록을 읽었다.

“의류 상자 세 개, 책 여섯 상자, 회사 자료 두 상자, 골프가방 하나, 여행가방 두 개, 소형가구와 잡화. 정확한 내용은 김수진 씨도 기억하지 못한답니다.”

“회사 자료는 폐기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동의가 필요합니다.”

사고 뒤 수진과 유리는 병원 가까운 임시집으로 옮겼다가, 재판이 시작된 뒤 다른 아파트로 갔다. 예전 집의 가구와 내 물건이 어디로 갔는지 나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수진이 알아서 정리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알아서.

그 말 안에는 상자를 구하고, 포장하고, 운반업체를 부르고,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고르고, 매달 돈을 내는 일이 들어 있었다.

“얼마 동안 낸 겁니까?”

“처음 계약은 5년 8개월 전입니다. 중간에 작은 보관함으로 한 번 옮겼고요.”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처음에는 더 큰 보관함이었다면 금액이 달랐을 것이다. 지금 금액만 곱해도 칠백만 원이 넘었다.

“왜 이제 말했답니까?”

“처음에는 한재호 씨가 병원에서 퇴원하면 정리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다음에는 재판이 끝나면 결정할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수감 뒤에는 이혼조정 때 같이 처리하려고 미뤘고요.”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수진도 다음 단계가 오면 정리될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동안 돈을 낸 사람은 수진이었다.

“이번 달 말에 계약을 끝내겠다고 합니다.”

서준호가 말했다.

“폐기 동의서에 서명해달라는 요청입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이번 주 안에 별도 보관처와 비용을 정해야 하고요.”

“수진 집에는 못 둡니까?”

“그 요청은 전달하지 않겠습니다.”

“묻기만 하는 겁니다.”

“그 집에 한재호 씨 물건을 두지 않으려고 돈을 내서 외부 창고를 사용한 겁니다.”

나는 계약서의 보관함 번호를 보았다. B동 214호. 내가 가본 적 없는 장소였다. 내가 입던 양복과 읽던 책들이 내가 모르는 번호 안에서 육 년 가까이 시간을 보냈다.

“수진은 지금 어디서 일합니까?”

“그 질문도 제가 답할 일은 아닙니다.”

“비용을 왜 이제 중단하는지 알아야 하잖습니까.”

서준호는 잠시 망설였다.

“김수진 씨 쪽에서 비용 사유로 밝힌 내용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세무법인에서 급여·장부 업무를 하고 있고, 지금 집 계약이 끝나면 어머니 집 가까이로 이사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사비와 보증금이 필요해서 고정비를 정리하는 중이고요.”

수진은 마흔한 살이었다. 사고 전에는 유리가 학교에 들어간 뒤 작은 세무사 사무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일을 ‘수진 일’이라고 불렀다. 내 회사는 회사였고, 수진이 다니는 곳은 수진 일이었다. 내가 버는 돈이 가족의 중심이고 수진의 급여는 보충이라고 생각했다.

수진은 사고 뒤에도 그 일을 계속했을 것이다. 병원에 오지 않는 시간에 출근했고, 재판 기일에 맞춰 휴가를 냈으며, 유리의 학교 일정과 내 치료 일정을 사이에 두고 장부를 정리했을 것이다.

나는 그 시간을 본 적이 없었다.

“장모님이 아프십니까?”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가까이 이사한다는 것만 전달받았습니다.”

나는 질문을 멈췄다. 수진이 어머니 가까이로 가는 이유는 나와 관계없는 것일 수 있었다. 돌봄 때문일 수도 있고, 집값이나 출퇴근 때문일 수도 있고, 그냥 그러고 싶어서일 수도 있었다.

“창고를 제 명의로 바꿀 수 있습니까?”

“가능 여부를 알아봤습니다. 본인 확인과 결제수단 등록이 필요합니다. 교도소 안에서 직접 계약은 어렵고 대리인을 세워야 합니다.”

“변호사님이 해주시면요?”

“법률사무 범위 밖이지만, 석 달 정도 임시로 관리업체를 연결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비용은 한재호 씨가 부담해야 하고요.”

내 영치금 잔액은 육십팔만 원 정도였다. 수진이 가끔 넣어준 돈, 수감 전 남은 예금에서 이체된 돈, 교도소 안에서 지급받은 소액이 합쳐진 금액이었다. 나는 그 돈으로 필요한 생활품을 사고, 전화 사용료와 문서 복사 비용 일부를 냈다.

보관료 석 달이면 삼십삼만 육천 원이었다. 관리업체 수수료와 운반비는 별도였다.

출소 뒤에는 휠체어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이 필요했다. 보증금, 침대, 욕실 손잡이, 경사로, 이동 지원. 나는 미래계획서에 그런 항목을 적으면서도 실제 가격을 계산하지 않았다. 산업안전 강의를 하면 수입이 생길 거라고 썼지만, 누가 나를 고용할지는 몰랐다.

창고의 양복과 책을 남기는 데 쓴 돈은 출소 뒤 필요한 돈에서 빠질 것이었다.

“물건 사진은 없습니까?”

서준호가 업체에서 받은 인수 당시 사진을 태블릿에 띄웠다. 창고 문 앞에 갈색 상자가 쌓여 있었다. 상자마다 수진의 글씨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겨울옷.

재호 책 1.

회사.

전자제품.

유리 만들기.

마지막 상자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확대해 주십시오.”

사진을 확대하자 상자 옆면에 작은 글씨가 더 보였다.

우주선 포함.

사고 전날 차 트렁크에 넣어둔 조립블록이었다.

유리에게 주려고 샀지만 주지 못한 장난감. 사고 뒤 차에서 꺼냈을 때 수진이 보관했을 것이다. 유리는 지금 열다섯 살이었다. 우주선 블록을 원했던 아이는 사진 속에서만 남아 있었다.

“저 상자는 폐기하면 안 됩니다.”

내가 말했다.

“유리 물건이면 수진 씨에게 보내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보내면 연락하는 것과 같잖습니까.”

“그럼 별도 보관해야 합니다.”

“나중에 유리가 원하면 줄 수 있습니다.”

서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곧 내가 다시 나중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았다. 우주선은 육 년 동안 나중을 기다렸다. 상자를 열지 않으면 약속도 실패하지 않은 것처럼 남았다.

“나머지 물건을 먼저 확인할 수는 없습니까?”

“업체 직원이 상자를 열어 목록과 사진을 보내주는 서비스가 있습니다. 출장 확인비와 상자당 작업비가 듭니다.”

“얼마입니까?”

금액을 들은 뒤 나는 다시 계산했다. 전부 확인하려면 두 달 보관료에 가까웠다.

“회사 자료 두 상자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무슨 자료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봐야 합니다.”

“민석 씨 보도 때문에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고 관련 자료라면 폐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서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상자는 제가 법률자료로 인수하겠습니다. 사건과 무관한 것으로 확인되면 다시 처리하고요.”

“책은요?”

“제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책 여섯 상자에는 물류관리, 프로젝트 경영, 영어 회화책이 들어 있을 것이다. 대학 때 읽은 소설과 수진이 사준 여행책도 있을 수 있었다. 출소 뒤 다시 읽겠다고 생각하자 책장은 자동으로 생겼다. 휠체어가 들어갈 집과 낮은 책장, 창가의 책상까지 머릿속에 나타났다.

그 집은 아직 없었다.

“양복은 폐기해도 됩니다.”

나는 말했다.

말하고 나서 검은색 정장 한 벌이 떠올랐다. 유리 돌잔치와 회사 임원면접 때 입었던 옷이었다. 지금은 체형이 달라 입기 어려웠고, 휠체어에 앉으면 바지 뒤쪽과 재킷 길이도 맞지 않을 것이다.

“골프가방도요. 소형가구, 전자제품도 폐기 동의하겠습니다.”

“책은?”

“한 상자만 남기고 싶습니다.”

“어떤 상자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출장 확인을 요청하겠습니다.”

나는 영치금에서 빠질 비용을 물었다. 확인비, 책 한 상자와 유리 만들기 상자를 옮기는 운반비, 석 달 임시보관료. 합계는 사십칠만 원 정도였다.

육십팔만 원 중 사십칠만 원.

남는 돈은 이십일만 원이었다.

“전부 쓰시겠습니까?”

서준호가 물었다.

“회사 자료는 변호사님이 가져가시잖습니까.”

“개인 물건 이야기입니다.”

“제가 가진 돈입니다.”

“맞습니다. 다만 가석방 계획에 의료비와 주거비를 적고 계셔서 묻는 겁니다.”

“영치금 사십칠만 원으로 집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 말은 수진에게도 적용됐다. 매달 십일만 이천 원은 이사 보증금을 만들기에 큰돈이 아닐 수 있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태블릿의 ‘유리 만들기’ 상자를 다시 보았다.

“우주선만 꺼내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가능할 겁니다.”

“사진을 확인한 뒤 장난감은 폐기하고, 상자 안에 유리 물건이 더 있으면 수진 쪽에 목록만 전달해주십시오. 보내지는 말고요.”

“책은요?”

“목록 확인 후 한 상자 분량만 고르겠습니다.”

“그때까지 한 달 보관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비용은 이십육만 원 안팎으로 줄었다. 여전히 아까운 돈이었다. 나는 미래의 집을 지키기 위해 현재의 물건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무엇인지 확인하지 않고 버렸다는 말을 견디기 싫어서 확인 비용을 쓰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합리성과 미련이 함께 있었다.

“수진이 낸 보관료는 재산정산에 반영해주십시오.”

내가 말했다.

“전액을 인정하겠다는 뜻입니까?”

“제 물건 보관에 든 실제 비용이면요. 계약내역 확인 후에요.”

“확인하겠습니다.”

“제가 가족을 위해 생활비를 냈다는 말로 상계하지 마시고요.”

서준호가 펜을 멈췄다.

“그 주장은 제가 먼저 한 적 없습니다.”

“제가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는 메모 끝에 밑줄을 그었다.

접견을 마치기 전 나는 폐기 동의서에 항목별로 서명했다. 의류, 골프용품, 소형가구, 전자잡화. 책과 회사 자료, 유리 만들기 상자는 보류라고 적었다.

전부 포기하지도, 전부 붙잡지도 않았다. 균형 잡힌 선택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선택을 잘했다.

의료동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른쪽 어깨가 다시 당겼다. 경사로 앞에서 나도윤이 손잡이를 잡기 전에 물었다.

“밀어드릴까요?”

나는 잠시 계산했다. 오늘 이동량, 어깨 통증, 방까지 남은 거리.

“네. 방까지 부탁드립니다.”

그는 더 묻지 않고 밀었다.

오후에 서진이 냉찜질 팩을 가져왔다. 수건을 한 겹 대고 어깨 위에 올리는 동안 나는 창고 비용을 기록했다.

수진 부담 기간: 5년 8개월.

현재 월 이용료: 112,000원.

확인할 것: 이전 요금, 운반비, 계약내역.

그 아래에 ‘가족을 위해 번 돈’이라고 쓰려다가 멈췄다. 대신 적었다.

수진이 실제로 낸 돈.

저녁 점호 무렵 서준호에게서 추가 확인서가 팩스로 도착했다. 업체가 상자 세 개의 개봉 작업을 이틀 뒤 진행한다는 내용이었다.

회사 자료 두 상자.

책 한 상자 표본.

유리 만들기 상자.

확인서 맨 아래에는 촬영 항목이 적혀 있었다.

내용물 전체 사진 및 개별 식별표시 촬영.

나는 우주선 상자가 아직 개봉되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비닐이 바랬는지, 모서리가 찌그러졌는지, 유리가 원했던 제품이 맞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 사진은 유리에게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이틀 뒤 내가 보게 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