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8 / 50
배수구 너머의 통로는 사람이 만든 길처럼 보이지 않았다.
처음 몇 미터는 금속 배관 사이의 빈 공간이었다. 그 뒤부터 벽과 바닥의 경계가 사라졌다.
검은 조직이 금속을 덮고 있었다.
표면은 젖은 피부처럼 매끄러웠고, 안쪽에서는 푸른빛이 아주 느리게 이동했다. 빛은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때로 갈라지고, 다시 합쳐지고, 미라 일행이 가까이 가면 잠시 멈췄다.
다니엘이 말했다.
“균류인가?”
아벨의 목소리가 휴대 단말기에서 답했다.
“균사 구조와 유사한 형태가 관찰됩니다.”
미라가 물었다.
“식물이야?”
“광합성 기관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동물?”
“근육조직과 유사한 수축이 부분적으로 관찰됩니다.”
“기계?”
“전기신호 전달이 확인됩니다.”
다니엘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하나만 골라.”
“현재 분류체계에서는 단일 범주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이안이 조직 가까이 다가갔다.
푸른빛이 아이를 향해 모였다.
미라가 이안의 손목을 잡았다.
“떨어져.”
“아프지 않아.”
“아직 안 만졌잖아.”
“저쪽에서 아프지 않다고 해.”
미라가 아이를 자신의 뒤로 당겼다.
“누가?”
이안은 검은 벽을 가리켰다.
“저기.”
다니엘이 아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리나 목소리가 들려?”
“목소리는 아니야.”
“그럼 어떻게 리나인지 알아?”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눈을 감고 벽의 진동을 들었다.
“리나 같기도 하고, 다른 애들 같기도 해.”
“몇 명?”
“많아.”
미라가 아벨에게 물었다.
“벽을 통해 음성신호가 전달될 수 있어?”
“해당 조직에서 저주파 진동과 전기활동이 확인됩니다. 인간의 청각신호로 변환 가능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안만 듣는 이유는?”
“이안 한의 신경반응 데이터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안이 말했다.
“검사할 때 귀에 들려준 소리랑 비슷해.”
다니엘이 일어났다.
“사라가 이걸 듣게 만든 거야?”
“검사 전에 이미 들었다고 했어.”
미라가 답했다.
“그럼 이게 도시 벽 전체에 있었던 거야?”
미라는 검은 조직이 이어지는 방향을 비췄다.
금속 배관 속으로 파고들고, 케이블을 감싸고, 오래된 균열을 따라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것보다 넓어.”
그들은 조직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갔다.
미라의 화상 입은 팔이 계속 욱신거렸다. 구급포 아래로 열이 올라왔다.
다니엘이 말했다.
“팔 썩으면 리나 못 찾는다.”
“걱정해주는 거야?”
“네가 문을 열어야 하니까.”
“솔직해서 좋네.”
“나도 네가 솔직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안이 앞서가다 멈췄다.
미라와 다니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다니엘이 아이를 향해 말했다.
“네 잘못은 아니다.”
이안은 벽을 보며 대답했다.
“엄마도 그렇게 말해요.”
“그건 맞는 말이야.”
“그런데 리나는 나 때문에 갔잖아요.”
다니엘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안이 물었다.
“리나가 돌아오면 나 싫어할까요?”
“너를 왜 싫어해?”
“내 이름 대신 들어갔으니까.”
다니엘이 미라를 바라봤다.
“리나는 네가 한 일을 알아야 해.”
“나도 말할 거야.”
“언제?”
“데리고 나온 뒤에.”
“왜 그 뒤야?”
“지금은 들을 수 있는 상태인지도 모르잖아.”
“또 네가 정하네.”
미라가 걸음을 멈췄다.
“뭐를?”
“언제 진실을 말할지, 누가 알아야 할지, 누가 위험을 감수할지.”
“여기서 싸우자는 거야?”
“우린 이미 싸우고 있어.”
다니엘이 가까이 왔다.
“리나를 데리고 나오면 네가 뭘 했는지 내가 직접 말할 거야.”
“그래.”
“그리고 리나가 원하면 널 다시는 못 보게 할 거다.”
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무슨 대답을 원해?”
“미안하다고.”
“미안해.”
“그 말로 끝날 것 같아?”
“안 끝나.”
미라가 말했다.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
다니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통로 중간에는 자동수리 로봇 한 대가 벽에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버려진 기계처럼 보였다.
가까이 가자 로봇의 관절 사이로 검은 조직이 자라 있는 것이 보였다. 균사 같은 섬유가 전력선과 유압관을 감싸고, 부서진 외장을 안쪽에서 지탱하고 있었다.
로봇의 한쪽 팔이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다니엘이 뒤로 물러났다.
“작동해?”
아벨이 말했다.
“기계 동력신호는 없습니다.”
“그런데 움직였잖아.”
“생체조직의 수축으로 관절이 이동했습니다.”
미라는 로봇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체에는 63년 전 제조표시가 있었다. 공식 기록상 같은 모델은 모두 폐기됐다.
“이 조직이 고친 건가?”
“원래 기능을 복원했다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아벨이 답했다.
로봇의 손에는 오래된 필터가 들려 있었다. 검은 조직은 손가락을 움직여 필터 표면을 긁고 있었다.
마치 수리 작업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이안이 물었다.
“살아 있어?”
미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기계는 죽었어.”
다니엘이 말했다.
“저 검은 건 살아 있고.”
“둘이 같이 움직이잖아.”
“그래도 로봇이 살아난 건 아니야.”
“왜?”
“생각을 안 하니까.”
이안이 로봇을 바라봤다.
“아저씨는 저게 생각 안 하는지 어떻게 알아?”
다니엘은 입을 다물었다.
아벨이 말했다.
“현재 관찰값으로 의식 여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럼 살아 있을 수도 있네.”
“생물학적 활동은 존재합니다.”
“로봇까지 포함해서?”
“경계를 정의할 수 없습니다.”
미라는 로봇 손에 들린 필터를 살폈다.
필터 표면의 먼지가 검은 조직 안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조직은 먼지 속 금속입자를 골라 로봇의 마모된 관절에 붙였다.
완전한 수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기계가 하지 못한 일을 생명이 임시로 이어가고 있었다.
미라는 새벽 정화실 센서 위의 먼지를 떠올렸다.
“먼지를 먹어.”
이안이 말했다.
“먼지 때문에 고장 난 걸 먼지로 고치네.”
검은 조직이 로봇의 머리를 돌렸다.
얼굴 없는 센서가 이안을 향했다.
이안의 코에서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미라가 즉시 아이의 얼굴을 잡았다.
“왜 피 나?”
“몰라.”
“머리 아파?”
“조금.”
다니엘이 구급포를 꺼냈다.
미라는 이안의 코를 눌렀다.
아이의 시선은 로봇이 아니라 벽 너머에 고정돼 있었다.
“누가 말해?”
미라가 물었다.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씩 들려.”
“뭐라고?”
“이름.”
“리나?”
“리나도 있고.”
이안은 눈을 감았다.
“마라. 준. 사예드. 이름 없는 애도 있어.”
다니엘이 물었다.
“몇 명?”
“모르겠어.”
“스물일곱 명?”
아벨은 대상군 0 기록을 떠올린 듯 말했다.
“현재 알려진 대상 수와 일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라가 이안을 흔들었다.
“듣지 마.”
“어떻게?”
“다른 생각 해.”
“엄마는 소리 들릴 때 다른 생각하면 안 들려?”
미라는 아이의 귀를 양손으로 막았다.
“이건 귀로 듣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어떻게 막아?”
이안이 눈을 떴다.
동공 주변의 실핏줄이 푸르게 보였다가 사라졌다.
미라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돌아가자.”
다니엘이 말했다.
“리나가 앞에 있어.”
“이안이 쓰러질 수 있어.”
“조금 전에는 기록 때문에 산소 떨어질 때도 계속 갔잖아.”
“지금은 달라.”
“뭐가?”
“이안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어.”
“리나 몸 안에서는 이미 일어나고 있어.”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미라는 자신이 계속 같은 선택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안과 리나.
자신의 아이와 다른 아이.
이번에는 돌아가면 이안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신 리나를 남겨두게 된다.
이안이 미라의 품에서 말했다.
“가.”
“괜찮지 않아.”
“리나가 더 아파.”
“네가 어떻게 알아?”
“같이 아파서.”
이안은 자신의 가슴을 눌렀다.
“내가 멈추면 저쪽이 더 크게 울려.”
미라는 아이를 내려놓았다.
“걷기 힘들면 바로 말해.”
“응.”
“소리 따라가지 마.”
“길은 따라가야 돼.”
“소리와 길은 달라.”
“여기서는 같은 것 같아.”
그들은 다시 걸었다.
뒤쪽에서 자동수리 로봇의 팔이 한 번 더 움직였다.
필터를 청소한 뒤, 로봇은 검은 조직의 힘으로 몸을 돌려 오래된 환기구를 향했다.
기계가 자신의 일을 계속하는 것인지, 생명체가 기계의 형태를 이용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로봇이 환기구 앞에서 멈췄다.
검은 조직이 팔을 움직여 막힌 필터를 꺼냈다. 새 필터는 없었다. 대신 벽의 균사 일부가 얇게 펼쳐져 빈 자리를 메웠다.
송풍이 시작됐다.
공기는 완전히 깨끗하지 않았다. 흙과 습기 냄새가 섞여 있었다.
미라는 그 공기를 들이마셨다.
제7도시의 규격에서는 불량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숨을 쉴 수 있었다.
“수리한 거야?”
이안이 물었다.
“원래대로는 아니야.”
“그래도 돌아가잖아.”
“필터 기능이 얼마나 가는지 몰라.”
“원래 부품도 영원히 안 가잖아.”
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 조직은 기계의 설계를 복원하지 않았다. 필요한 결과만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냈다.
다니엘이 말했다.
“콘티뉴엄이 저걸 시킨 걸까?”
아벨이 답했다.
“명령신호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럼 스스로 한 거야?”
“현재 행동이 학습·유전·외부 신호 중 무엇에 의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이안이 로봇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로봇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환기구에서 나온 불완전한 공기가 세 사람의 얼굴을 지나갔다.
통로 앞이 갑자기 끊겼다.
아래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수직공간이 있었다. 반대편 통로까지는 약 6미터.
과거에는 금속 다리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검은 조직이 굵은 다발로 양쪽 벽을 연결하고 있었다.
미라는 작업등을 아래로 비췄다.
빛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돌아가야 해.”
다니엘이 말했다.
“다른 길 없어.”
“저걸 밟고 건너?”
검은 다발은 사람 팔만큼 굵었다. 표면의 푸른빛이 세 사람의 움직임에 맞춰 빨라졌다.
미라가 공구 하나를 올려놓았다.
조직이 움푹 들어갔다가 다시 원래 형태로 돌아왔다.
공구는 떨어지지 않았다.
“무게는 버텨.”
“살아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더 위험해.”
이안이 말했다.
“건너도 된대.”
미라가 돌아봤다.
“누가?”
“저쪽.”
“말 들린다고 다 믿지 마.”
“엄마도 아벨 말 듣고 왔잖아.”
“그래서 팔 데었어.”
“이번에는 맞을 수도 있잖아.”
다니엘이 말했다.
“내가 먼저 간다.”
그는 검은 다발 위에 한 발을 올렸다.
조직이 수축하며 발목을 감쌌다.
다니엘이 즉시 발을 뺐다.
표면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물었어.”
아벨이 말했다.
“표피에서 미세한 침상구조가 돌출됐습니다.”
미라가 물었다.
“독성?”
“표본이 필요합니다.”
“다니엘, 발 보여줘.”
작업화 표면에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피부까지 닿지는 않았다.
이안이 검은 다발 앞에 섰다.
푸른빛이 아이의 발밑으로 모였다.
“안 돼.”
미라가 막았다.
“나한테는 안 그럴 거야.”
“어떻게 알아?”
“느껴져.”
“그게 네 생각인지 저게 넣은 생각인지 모르잖아.”
이안은 미라를 바라봤다.
“엄마가 나를 지키고 싶다는 것도 엄마 생각인지 기능 때문인지 어떻게 알아?”
미라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뜻이야?”
“엄마 기능은 고치는 거잖아.”
이안이 말했다.
“나를 고장 난 것처럼 생각하는 거 아니야?”
“너는 고장 난 게 아니야.”
“그럼 왜 내가 변할 수도 있다는 걸 무조건 막아?”
미라는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저게 뭔지 모르니까.”
“나도 내가 왜 소리를 듣는지 몰라.”
“그래서 더 위험해.”
“모르는 건 다 위험해?”
미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안이 검은 다발 위에 발을 올렸다.
조직은 그를 감싸지 않았다.
오히려 표면이 넓어지며 발판처럼 평평해졌다.
미라는 아이의 허리를 붙잡았다.
“천천히.”
이안이 한 걸음씩 걸었다.
푸른빛이 발밑에서 반대편으로 이어졌다.
중간쯤 갔을 때 수직공간 아래에서 진동이 올라왔다.
쿵.
검은 다발 전체가 흔들렸다.
이안이 균형을 잃었다.
미라가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조직이 순간적으로 솟아올라 아이의 허리를 감쌌다.
이안은 떨어지지 않았다.
미라가 조직을 자르려고 공구를 들었다.
“하지 마!”
이안이 소리쳤다.
“잡아준 거야.”
조직은 아이를 반대편에 내려놓은 뒤 천천히 풀렸다.
다니엘이 중얼거렸다.
“이안을 알아보는 건가?”
아벨이 답했다.
“특정 생체신호에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리나는?”
“리나 소의 현재 생체신호와 해당 조직의 신호 유사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미라는 검은 다발을 바라봤다.
“이게 리나 안에도 있다는 뜻이야?”
“가능합니다.”
이안이 반대편에서 말했다.
“여기로 와.”
미라는 먼저 건넜다.
조직은 그녀를 받쳤지만 발목을 여러 번 조였다. 화상 입은 팔에서 피가 구급포 밖으로 조금 흘러나오자 검은 표면이 피를 향해 움직였다.
미라는 급히 팔을 들었다.
작은 섬유 하나가 공중에서 흔들리다 다시 들어갔다.
다니엘은 마지막으로 건넜다.
조직이 그의 체중을 버티면서도 계속 침상구조를 내밀었다. 그는 넘어질 뻔했지만 미라와 이안이 양쪽에서 잡아 끌었다.
반대편 통로에는 인간이 만든 문이 없었다.
검은 조직이 원형으로 얽혀 벽을 막고 있었다.
이안이 손을 올렸다.
“기다려.”
“이번엔 뭐가 들려?”
미라가 물었다.
“겁먹었어.”
“저게?”
“안쪽에서.”
“리나?”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리나만 아니야.”
검은 벽의 빛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안의 코피가 다시 흘렀다.
이번에는 붉은 피 사이에 아주 가는 검은 실이 섞여 나왔다.
미라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집었다.
실은 공기와 닿자 몸을 비틀듯 수축했다.
다니엘이 놀라 뒤로 물러났다.
“몸 안에 들어간 거야?”
아벨이 말했다.
“생체조직 또는 응고된 단백질로 추정됩니다.”
“추정 말고 확인해.”
“분석장비가 없습니다.”
미라는 검은 실을 금속판 위에 놓았다. 실은 몇 초 동안 움직이다 말라붙었다.
이안이 그것을 보며 말했다.
“죽었어.”
“처음부터 살아 있었는지 몰라.”
미라가 답했다.
“움직였잖아.”
“전기로 움직일 수도 있어.”
“엄마는 살아 있다는 걸 어떻게 정해?”
“지금 그 얘기 할 때 아니야.”
“리나도 움직이고 생각하면 살아 있는 거잖아.”
“리나는 당연히 살아 있어.”
“변해도?”
미라는 입을 다물었다.
이안이 벽에 손을 대자 검은 조직 전체가 떨렸다.
아이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장면이 펼쳐지는 듯 동공이 빠르게 움직였다.
“뭐 보여?”
“도시가 아니야.”
“그럼?”
“밖.”
“지표?”
“비슷한데, 나무가 철을 먹어.”
“손 떼.”
“아이들이 있어.”
“리나?”
“리나도 있고, 얼굴 없는 애들도 있어.”
이안의 무릎이 꺾였다.
미라가 받아 안았다.
그 순간 도시 전체가 1초 동안 꺼졌다.
이번에는 미라도, 다니엘도, 이안도 분명히 느꼈다.
작업등이 꺼지고 아벨의 음성이 끊겼다.
검은 조직의 빛만 남았다.
푸른 선들이 벽 전체에서 동시에 켜졌다.
수천 개의 신경이 어둠 속에 드러난 것 같았다.
1초 뒤 작업등이 돌아왔다.
다니엘이 물었다.
“지금 것도 기록에 없어?”
아벨이 대답했다.
“전력 중단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셋 다 봤어.”
“저의 작동기록에도 중단은 없습니다.”
“너도 말이 끊겼잖아.”
“연속적으로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미라는 몇 시간 전 공기가 멎었던 정화실을 떠올렸다.
도시가 멈췄지만 기록은 멈추지 않았다.
혹은 기록만 계속됐고 현실이 멈췄다.
검은 벽이 천천히 갈라졌다.
안쪽에서 따뜻한 공기가 나왔다.
공기에는 식물 냄새와 금속 냄새,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벨이 말했다.
“새로운 경로가 생성됐습니다.”
미라는 물었다.
“원래 없던 길이야?”
“현재까지 관찰된 적 없습니다.”
“방금 만든 거네.”
“가능합니다.”
통로 안쪽 벽에는 투명한 막들이 달려 있었다.
각 막 안에서 작은 빛들이 심장처럼 뛰었다.
이안이 앞으로 걸었다.
“리나?”
미라가 팔을 잡았다.
어딘가에서 아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스피커도, 단말기도 없었다.
벽 자체가 떨리며 소리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여러 목소리가 겹쳐 있었다.
이안이 벽 가까이 귀를 댔다.
“뭐라고 해?”
다니엘이 물었다.
이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 이름.”
“리나야?”
“모르겠어.”
진동이 다시 문장처럼 모였다.
이번에는 미라와 다니엘도 들었다.
아이의 목소리였다.
리나와 비슷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이안.”
벽의 푸른빛이 한꺼번에 아이를 향했다.
“네 차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