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6 / 10
성호의 일정은 점점 많아졌다.
촬영. 연습. 인터뷰. 라디오.
지연은 매일 성호와 붙어 다녔다.
예전 같으면 둘이 하루 종일 같이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평일에는 각자 회사에 갔고, 저녁에는 밥을 먹고 각자 휴대전화를 봤다.
그런데 이제는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였다.
어느 날 오후.
다음 일정까지 두 시간이 비었다.
성호가 차에 타자마자 말했다.
(성호) : “밥 먹자.”
(지연) : “뭐 먹을래?”
(성호) : “아무거나.”
지연이 쳐다봤다.
(지연) : “세상에서 제일 싫은 대답.”
(성호) : “김치찌개.”
(지연) : “그건 어제 먹었잖아.”
(성호) : “그러니까 내가 아무거나라고 했지.”
지연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결국 둘은 근처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성호는 메뉴판을 한참 보더니 제육볶음과 계란말이를 주문했다.
반찬이 나오자 오이무침을 자연스럽게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지연이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봤다.
성호는 지연이 오이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11년 동안 수도 없이 했던 행동이었다.
계란말이가 나오자 이번에는 지연 앞에 밀어놓았다.
(성호) : “이거 먹어.”
(지연) : “당신도 좋아하잖아.”
(성호) : “하나 더 시키면 되지.”
지연은 계란말이를 한 조각 집었다.
너무 익숙했다.
그런데 맞은편 얼굴은 여전히 낯설었다.
성호가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다.
길게 내려온 속눈썹이 보였다. 물을 마실 때마다 목선이 움직였다. 웃을 때는 눈이 살짝 접혔다.
지연은 자기도 모르게 또 쳐다봤다.
성호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성호) : “또 본다.”
지연이 바로 시선을 내렸다.
(지연) : “뭘.”
(성호) : “나.”
(지연) : “안 봤어.”
(성호) : “요즘 자꾸 보던데.”
(지연) : “당신 얼굴에 뭐 묻었나 확인하는 거야.”
성호가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성호) : “그럼 닦아줘.”
지연이 휴지를 던졌다.
(지연) : “직접 해.”
성호가 웃었다.
그 웃음이 또 괜히 신경 쓰였다.
밥을 먹고 둘은 카페에 갔다.
커피를 마시고도 시간이 조금 남았다.
다음 촬영장까지 걸어서 십오 분 정도였다.
(성호) : “걸어갈까?”
지연이 창밖을 봤다.
날씨가 좋았다.
(지연) : “그래.”
둘은 나란히 거리를 걸었다.
성호는 모자를 푹 눌러썼다.
지연은 별생각 없이 옆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성호가 생각보다 컸다.
원래도 키가 큰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스무 살의 몸이었다.
어깨는 반듯했고, 긴 팔과 다리가 옷 위로도 선명했다.
지연은 잠깐 성호를 올려다봤다.
11년이나 같이 산 사람인데.
이제야 처음 체격을 보는 사람 같았다.
그때 맞은편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성호가 자연스럽게 지연 쪽으로 붙었다.
넓은 어깨가 지연 앞을 반쯤 가렸다.
(성호) : “이쪽으로.”
성호가 지연의 손목을 잡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순간 지연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손이 따뜻했다.
손목을 감싼 손가락이 길었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런데 성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지연이 아래를 봤다.
성호의 손이 손목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손바닥이 닿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가락이 얽혔다.
지연의 걸음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둘이 손을 잡고 있었다.
(지연) : “뭐 해?”
성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성호) : “사람 많잖아.”
지연이 주위를 둘러봤다.
조금 전까지 몰려 있던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뒤였다.
거리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지연) : “별로 없는데.”
성호가 태연하게 말했다.
(성호) : “아까 많았잖아.”
그런데도 손은 안 놓았다.
지연도 굳이 빼지 않았다.
몇 걸음쯤 걸었을 때 성호가 옆을 봤다.
(성호) : “당신 왜 이렇게 조용해.”
(지연) : “그냥.”
(성호) : “긴장했어?”
(지연) : “내가 왜.”
성호가 웃었다.
(성호) : “귀 빨개졌는데.”
지연이 바로 성호 손을 놓았다.
(지연) : “더워서 그래.”
성호가 하늘을 봤다.
(성호) : “오늘 19도인데?”
(지연) : “닥쳐.”
성호가 웃었다.
지연도 결국 웃음이 났다.
조금 뒤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
신호가 바뀌었다.
성호가 먼저 한 발 내딛다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지연은 그 손을 잠깐 봤다.
예전에는 수도 없이 잡았던 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지연은 결국 그 손을 잡았다.
성호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둘은 손을 잡은 채 길을 건넜다.
촬영장 앞에 도착할 때까지 손은 그대로였다.
지연은 문득 스물다섯 살 때를 떠올렸다.
성호와 처음 연애하던 때.
같이 밥을 먹고, 카페에 가고, 별것도 아닌 길을 오래 걸었던 때.
오늘 한 일도 똑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때보다 더 낯설었다.
옆에 있는 남자는 11년을 같이 산 남편이었다.
그런데 얼굴은 스무 살이고, 손을 잡고 걷는 것만으로 심장이 뛰었다.
지연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성호가 물었다.
(성호) : “왜 웃어?”
지연은 고개를 저었다.
(지연) : “그냥.”
성호가 지연을 잠깐 바라봤다.
그리고 손을 조금 더 꽉 잡았다.
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1년 같이 산 남편인데.
오늘은 정말 다른 남자와 데이트한 것 같았다.